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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특집8] 주몽, 그 비극적 최후

차화로 2007. 3. 7. 20:30
 

 [특집8] 주몽, 그 비극적 최후를 위하여

                  - 드라마에서는 해모수가 주몽의 실제 모습에 가까워 -

 

                                                   

                                                            김운회(동양대 교수)


  (1) 드라마 주몽


  MBC의 인기 드라마 ‘주몽’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으레 고무줄 편성, 조잡한 전투씬 등 준비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국민적인 역사인식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주몽은 역사적으로는 많이 왜곡된 드라마이다. 이 점은 필자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드라마 작가의 문제가 아니다. 고대사에 대한 전반적인 패러다임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학자들이 제구실을 못하는 한국의 환경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필자는 여러 차례 주몽은 왕건이나 이성계 같은 분처럼 실존인물로 볼 수는 없다고 했다[주①].


  주몽과 관련하여 가장 큰 문제는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는 기록이 기원 전후의 사료에서는 실제 인물로 확인되지 않고, 설령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화나 설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가 정사라고 부르는 중국 사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초기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전면적으로 믿어야 한다거나(전면적 긍정론) 일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수정론)들이 대두하고 있다. 그 동안의 연구를 보면 고구려 본기에 전하는 왕들 가운데 고구려 자체의 전승에 입각한 왕으로서 그 실재함이 확인된 최초의 왕은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이라고 한다[주②]. 무엇보다도 『삼국사기』는 당대의 역사서가 아니고 1천년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문헌 비판은 주변국의 사서와의 대비를 통해서 보다 객관적으로 검정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삼국사기』에서는 대무신왕 4년(AD 22년) 부여를 정벌하였고 동왕 5년에는 대소왕을 참수한 후 돌아왔다고 하고 태조왕 69년(122년) 10월 왕이 부여에 가서 태후묘에 제사하였다고 하는데 동년 12월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 한병(漢兵)과 협력하여 아군(고구려군)을 공격하여 아군(고구려군)이 대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다른 사서로 확인되는 사실은 위구태의 경우이다. 따라서 위구태가 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분명히 사실인데 이것은 AD 120년 경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이전의 사건들은 사실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또 태조왕의 재위기간(53~146)이 무려 94년이라는데 이것도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태조왕을 이은 차대왕은 76세에 즉위하여 95세에 사망했으며, 신대왕은 77세에 즉위하여 91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여기에 태조왕에서 신대왕에 이르기까지 왕호가 다른 왕들의 왕호와 전혀 다르다는 점도 이 시기를 전후로 무엇인가 상당한 역사적 왜곡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유들로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삼국의 시조들의 건국연대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실제로 삼국의 국가적인 기반이 성립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의 경우 태조대왕(?~145), 백제의 고이왕(234~285), 신라의 내물왕(356~401)부터라고 하는 것이 거의 통설로 되어있다[주③]. 고구려의 경우 주몽에서 모본왕까지 성이 해씨(解氏)이고 6대 태조대왕 이후 성이 고씨로 변하였다. 즉 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국가 단계에서 보다 강력한 새로운 집단이 나타나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시작이 태조대왕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온조와 비류도 해씨 혈통이었다[주④].

 

  고구려 전문가인 노태돈 교수(서울대)는 『삼국사기』의 건국신화는 소수림왕 때 연나라와 남부여(백제)의 침입으로 나타난 엄청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對부여계(남부여계 또는 백제계)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 고구려 초기 왕계도 함께 정립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소수림왕(371~384)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귀족들을 결속시켜 왕실을 중심으로 국가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시조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강행하였을 것이라고 한다[주⑤]. 이 견해는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견해로 생각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대로 부여의 동명신화나 고구려의 주몽신화는 사실상 동일하고 주몽 또는 추모라는 말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라는 등의 측면에서만 봐도 주몽으로 알려져 있는 고구려의 시조가 왕건과 같은 실존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고구려의 건국에 있어서 분명히 왕건이나 이성계 같이 고구려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나 가계 또는 세력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 분의 휘(諱 : 왕의 이름)가 정확히 어떤지를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태 - 소서노 - 주몽 - 비류․온조의 이야기는 마치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BC 1세기 이전의 이야기와 AD 3세기의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된 상태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동안 주몽이 우리 민족(쥬신)의 건국 영웅의 표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앞으로 이 주몽에 해당되는 분이 누군지 본격적으로 찾는 작업은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지금부터 이 주몽이라는 분에 대하여 추적해 보기로 한다.  


  (2) 초기 고구려


  고구려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는 BC 3세기로, 남한에서는 BC 1세기 경으로 추정하는 등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삼국사기』는 BC 1세기 경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만약 이 기록을 믿는다면 일단 이 시기의 기록들을 검토해야할 것이다.


  고구려 후기의 유력 가문이었던 고자(高慈)의 묘비명의 기록에 “고구려가 주몽의 건국 이후 708년 30여 대에 걸쳐 존속하였다”라고 하는데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BC 1세기) 고구려 관련 기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주몽의 실체를 쉽게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정사들에 나타난 고구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서(漢書)』로 무제 원봉 3년(BC 108년) 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음해 4군을 설치하는데 현토(玄ꟙ) 군에 고구려현이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명이 아니라 종족이나 집단의 명칭에 지역성을 부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나라(전한) 시기를 통해서 고구려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고구려에 대해서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위서」동이전)이다. 이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리’ 또는 ‘구려’라는 말은 이전부터 나타나지만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한서(漢書)』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 설치했던 4郡[한사군]중에 하나인 현도군(玄菟郡)과 관련이 있다(한사군중 진번과 임둔은 실제로 없었던 군현으로 보고 있다). 후한 때 학자인 응소(應劭)는 “현도군은 본래 진번국이었다”고 썼으며(『史記』「朝鮮列傳」註釋)『한서』에서는 “고구려현은 옛 고구려 오랑캐(胡)이다.”라고 한다[주⑥].


  이상의 기록들은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성립되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대체로 고조선 서부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 ①] 한나라


  코리족(고리족 혹은 구리족)에서 기원한 고구려족은 고조선이 멸망(BC 108)한 후 한족 세력들과 투쟁을 통해서 성장한 국가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한족(漢族) 세력을 몰아낸 것은 “현도군은 후에 이맥[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구려의 서북으로 옮겨갔다.”라고 하는 진수『삼국지』의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듯이 고구려 건국이 BC 37년경이라면(『삼국사기』) 고구려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제대로 된 형태의 고대국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에서도 “궁실(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비류수 강가에 초막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라고 하듯이 건국과정이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건국 당시에는 고구려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음을 말하고 있다.


  초기의 고구려는 진수의 『삼국지』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산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형태의 나(那)가 국가 형성의 단위가 되었다. 여기서 나(那)라는 것은 내[川] 또는 물가를 의미하고 나라(國) 또는 나루(津)라는 말의 어원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대에 한국말을 한자로 표기한 경우를 보면, 신(新), 동(東), 금(金) 등은 ‘쇠’를 의미했고 땅은 땅의 뜻을 가진 몽골어 및 만주어인 ‘나[na]’를 표현하기 위해 나(那), 노(奴), 라(羅), 천(川 : 나리, 나이, 내), 진(津 : 나루), 사(邪), 랑(良) 등의 글자들을 사용하였다. 좁은 의미로 지방, 넓은 의미로 나라를 의미한 것은 야(野), 나(那), 노(奴), 노(弩), 라(羅), 천(川), 진(津), 사(邪), 량(良), 양(壤), 양(穰) 등의 한자로 표기하였다. 이 가운데는 뜻을 빌린 것도 있지만 음을 빌린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 한자가 가진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나(那)는 독자적인 소국이나 부족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나(那)들 가운데 큰 것들은 왕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나(那)는 부(部)로 발전하였고 그 부들이 5개의 부로 서서히 통합되어 간 것이 소위 고구려의 5부(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등)였다. 이 5부 가운데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오다가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삼국지』동이전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다만 나(那)는 독자적인 소국이나 집단인데 반하여 부(部)는 왕권 아래 종속된 자치제였다는 점에서 다르고, 5부의 성립 시기는 압록강 중류 지역의 모든 집단들에 대한 고구려왕의 지배력이 확립된 때였음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태조대왕 22년(AD 76년)경에는 5부가 확립된 것이 확인된다[주⑦].


  구체적으로 본다면, 『한서(漢書)』「흉노전」에는 24인의 왕장(王將)이 회합한다는 기록이 보이고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에는 제부(諸部)가 회합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部)라는 명칭 또한 후한(AD 25~220) 시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의 5부(五部)라는 존재도 후한의 시기에 주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국을 구성한 집단들을 부라고 표기한 것은 3세기말에 편찬된『삼국지』가 처음이고 한족(漢族)들이 ‘부’라고 부르는데 영향을 받아서 고구려인들도 부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서 ‘부(部)’라고 칭한 것은 동서남북의 방향을 제외하면 연나부(椽那部), 제나부(提那部), 환나부(桓那部), 비류부(沸流部), 관나부(貫那部) 등이 보일 뿐이다[주⑧].


  이 같은 사정으로 볼 때, 고구려가 설령 건국을 했다고 해도 사가들에게 주목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건국이라는 것이 BC 1세기 초기 고구려에는 나(那) 정도의 수준이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삼국사기』에서도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이다. 당시의 사서인 『한서(漢書)』에도 고구려 건국에 대한 별 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3) 주몽을 찾아서


  우리가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하여 BC 1세기를 주목하였다면 이 시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관련 기록들을 검토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진수의 『삼국지』이전에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지 않고 매우 단편적으로 한 두 건씩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BC 1세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주몽과 가장 근접한 인물로는 『한서』에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라는 인물이 있다. 이 기록을 소상히 살펴보자.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그들은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나라의 법을 범하고 도적질을 일삼자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오히려 피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이 모든 책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 있다고 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 : 고구려인을 말함)이 난동을 피우는 것은 역심이 있어서이니 이를 평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여의 무리들은 유순하지만 흉노는 아직도 정벌하지도 못하였고 부여․예맥이 다시 활동하면 큰 우환거리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예맥이 큰 반란을 일으키자 엄우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추의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주⑨].”


  이 기록은 AD 12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후(고구려왕) 추는, BC 1세기 중 후반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주몽이거나 혹은 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의 기록은 시기적으로 일반적으로 보고 있는 고구려 건국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북한에서와 같이 BC 3세기까지 고구려 건국시기를 높게 잡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적어도 고구려 건국 시조로 명명되고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고구려의 왕(제후)인 사람의 이름에 추(騶)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말먹이꾼이라는 비칭(卑稱)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 추(騶)는 음차를 한 것이기 때문에 주몽, 추모, 추무 등의 발음과 거의 동일하다. 즉 당시 고구려를 대표하는 군장(君長)인 추(騶)는 추모(鄒牟)의 추(鄒)와 그 음이 같으며 추모는 『위서(魏書)』고구려전 이후에는 주몽(朱蒙)으로 표기되고 있다.


  셋째, 당시 고구려를 대표하는 지위를 나타내는 말은 고구려후(또는 고구려왕)를 사용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BC 1세기 경 고구려 땅에는 수많은 소규모의 나(那)들이 존재했을 텐데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후라는 명칭은 수많은 이들 나(那)들을 대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후가 피살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장군 연비(延丕)가 피살되었다고 하고 있지만 이것을 검증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전체적인 정황으로 볼 때 고구려의 장군 연비(延丕)가 피살되었다기보다는 고구려왕 추모가 피살되었다는 것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


  넷째,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쫓겨난 시기가 BC 75년경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한나라와 이 지역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고구려후 추의 세력과의 갈등이 깊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후 추의 죽음은 이러한 갈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서 지방에서의 현도군의 축출 후 고구려후 추의 피살은 35년여의 시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이 때 피살된 추의 아버지나 부계 혈족이 주몽이라는 말이 된다. 

 

  필자가 보기엔 고구려후 추라는 분이 우리가 말하는 주몽일 가능성이 크다. 이 분야의 전문가에 따르면, 몽이라는 말은 말갈족의 당나라 조공사절의 이름에 빈번히 나타나는 말로 인명을 나타내는 파생접미사로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생략이 될 수도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면 결국 주몽 또는 추무는 추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주⑩].


  그리고  고구려 후라는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나라의 제후이면서도 한나라(실제로는 왕망이 건국한 신나라이나 이 나라는 단명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해가 쉽도록 한나라로 표기함)의 고구려군 징발에 응하지 않은 점으로 봐서 몇 가지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첫째, 한나라의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이 미약하고 고구려현 내에서도 중앙집중적인 권력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나라가 군대를 동원하려하자 고구려왕이 이를 거부한다거나 요서의 지방관의 공격을 격퇴한 점을 미루어 보면 한나라의 군현 통치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한나라군대가 쳐들어오자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고구려왕이 오히려 사로잡히는 것을 보면 이 같은 정황을 알 수 있다.


  둘째, 고구려와 예맥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고구려는 예맥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여․예맥이라고 하여 일단 국체가 형성된 나라를 동일 민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만약 하나의 쥬신이 10개의 나라를 순서대로 세우게 되면 10개의 민족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그 많은 종족이 탄생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구려후에 대해서 『후한서』는 분명히 단순히 한나라에 신속만 한 존재는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후한서』에서는 예족의 우두머리[추수(酋帥)]들은 현후(懸侯)로 봉하여 조하(朝賀)하도록 하였고 옥저는 옥저후(沃沮侯)가 되었지만 옥저는 고구려에도 신속하고 있다[주⑪]. 즉 AD 1세기 경 고구려는 상당한 형태의 힘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보이는 고구려후에 대해서는 이전에는 그와 같은 기록이 없을뿐더러 이전에 만약 한나라와 대적할 생각을 할 정도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만약 그런 경우가 있었다면 기록에 남았을 것이다), 고구려 건국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가 없는 점을 감안한다면 주몽은 바로 이 추라는 분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고구려왕 추는 한나라(사실은 신나라) 대군을 맞이하여 장렬하게 전사하고 그 목은 장안으로 옮겨져 효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서(梁書)』고구려전의 기록에는 “광무제 건무 8년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고 이 때 비로소 고구려왕을 칭하였다. 한나라 상제․안제 연간에 고구려의 왕이름은 궁이었다.”라고 하고 있다[주⑫]. 즉 AD 32년 대무신왕 12년경에 왕을 칭하였고 상제(105)․안제(107) 연간에 고구려왕의 휘(諱)는 궁(宮)이라고 하는데 이 때 고구려는 태조대왕(AD53~146)의 재위시기이다.


  그런데 태조대왕을 『삼국사기』에서는 국조왕 즉 건국시조라고 하는데 이 분은 유리왕의 손자이고 그 어머님은 부여인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 국조왕 태조는 일반적으로 건국시조의 시호이므로 그 이전의 고구려가 있었기는 했지만 태조 이후에 나라의 틀이 잡혀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자체의 전승에 입각한 왕으로서 그 실재함이 확인된 최초의 왕은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태조대왕이 건국시조로서의 개연성이 더 크다.

 

  정리하자면 ① 주몽이라는 쥬신(범한국인)의 건국 시조의 표상이 존재하고 ② 고구려 후 추의 가문을 중심으로 고구려인들의 자치력을 확대, ③ 자치력의 확대로 인한 한족과의 대립, ④ 고구려 후 추의 피살, ⑤ 대무신왕 때 왕을 처음으로 칭하고 ⑥ 한나라 상제․안제 연간에 고구려의 왕 이름은 궁(태조대왕에 해당), 그 후 ⑦ 산상왕 때 최초로 왕의 실재와 기록이 일치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BC 1세기라고 한다면 주몽과 가장 근접한 인물로는 『한서』에 나타나는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엇보다도 이외의 다른 인물이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4) 주몽을 위하여


  주몽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다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왜 고구려가 고대국가라고 보기 힘든 상태의 공동체를 국가의 건국이라고 하면서 그 시조를 왕의 수준으로 격상시켰는가 하는 점과 다른 하나는 건국과정에서 한족(漢族) 또는 중앙정부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기초를 세웠는가 하는 점이다.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이해하려면 ① 한왕조의 주변민족 지배방식 ② 청태조 김누루하치(아이신조뤄누루하치)의 경우 ③ 조선 태조 이성계의 경우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먼저, 한족(漢族)의 이민족 지배방식은 이민족의 족장들을 포섭하여 제후에 봉함으로써 자치권을 일정하게 주면서 한(漢) 왕조에 복종시키려 하는 고전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이민족들이 독립적인 경향을 강화하거나 한 왕조에 복종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 왕이나 제후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좀더 복종심이 강한 제후를 다시 임명하는 식으로 주변민족을 지배하려 한다. 이것은 중원을 지배하는 어느 정권이라도 대동소이하다. 그 과정에서 한족의 계획대로 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더욱 적개심만 부채질하여 결국은 보다 독립적인 제국으로 발전하여 중원 땅이 이들에게 지배되는 경우도 많았다. 


  청태조 김누루하치의 경우에는 부족장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명나라의 술책으로 잃고 만주와 몽골을 심하게 이간질하는 명(明)나라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다가 저 유명한 싸얼후(薩爾滸 : Sarhŭ) 대전(1619)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중국경영에 나서게 된다. 초기에 김누루하치의 선대는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들 세력의 확대를 우려한 명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엉뚱한 누명을 씌워 살해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고구려 후 추의 죽음과 매우 흡사하다.

 

 

 [그림 ②] 청 태조(김누루하치)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명을 정벌해야만 하는 소위 7대한(七大恨)의 으뜸으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나라 정부(당시의 명나라 요동총병 이성량)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들고 있다. 이 같은 한을 가진 김누루하치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부지런히 힘을 길러 여진 수령에게 주는 최고영예인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직함을 받았다[주⑬].

 

 

          [그림 ③] 싸얼후 대전과 청군의 진출로  


  참고로 싸얼후 대전은 역사상 한족(漢族)과 쥬신(Jüsin : 범한국인) 사이에 벌어진 최대 전쟁의 하나이다.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싸얼후에서 2만의 정예 병력으로 명나라의 27만 대군을 격파했다[주⑭]. 싸얼후(薩爾滸) 대전은 동아시아의 역사상 3대 전쟁이라고 평가 할만 하다.


  청태조 김누루하치의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우리가 본대로, 고구려 후 추의 삶의 여정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김누루하치의 할아버지가 한족(명나라)의 유인으로 피살된 후 김누루하치는 철저히 대비하면서 힘을 길렀을 것이다. 고구려 후 추의 후손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태조 이성계의 경우와 주몽의 유사점을 찾아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등극한 후 자신의 조상들을 모두 제왕으로 추존하였다. 즉 “해동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 ”에서 이 육룡의 첫 인물이 바로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이고 그 다음에 익조(翼祖 李行里) 도조(度祖 李椿) 환조(桓祖 李子春) 태조(太祖 李成桂) 태종(太宗 李芳遠) 등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목조부터 환조의 네 분은 바로 태조 이성계의 직계 조상이었고 이 분들의 힘으로 이성계 자신이 결국 등극하게 되었다는 것을 『용비어천가』는 강조하고 있다. 만약에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이성계와 같은 인물이라면 그 이전의 주몽에서 모본왕에 이르는 분들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추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체제가 정비가 되어 내외적으로 손색이 없는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 태조대왕 때라면 그 이전의 왕들 또는 부족장급이었던 선조들을 추존하여 왕조의 역사로 예우를 갖추어 서술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주몽의 일생은 고구려 후인 추(騶)일 가능성이 크고 고구려후인 추는 원래는 고구려(고리)족의 부족장급이었는데 한족으로부터 제후로 책봉(고구려후)을 받아서 한족과의 협력을 하던 중 점차적으로 독립하여 독자세력을 키우고 이것이 후일 고구려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후 추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한족이 그를 유인하여 제거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더욱 세력을 길러 한족에 대항하여 대무신왕에 이르러 세력이 급속도로 확장되었으며 드디어 태조대왕에 체제적으로 정비된 고대국가를 건설하게된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 건국의 실체이다. 만약 연령상으로 다소 맞지 않다면 고구려후 추의 아버지가 주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고구려의 건국을 BC 1세기로 본다면 주몽은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가장 근접한 인물인 고구려 후 추라고 볼 수밖에 없다. 역사상 이 분 이외의 인물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고구려후 추는 요서지역에서 힘을 길러 고구려 건국의 기틀을 세운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분이 우리가 아는 주몽이라면 이 분의 삶은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한나라의 팽창으로 고조선이 위축되고 현도군(玄菟郡)이 설치되어 한나라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현도군내의 고구려현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초기 건국 세력들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점차적으로 힘을 길러 사실상 국가적인 조직들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결국 현도군의 한나라군들을 물리치고 한나라와 갈등을 빚게 되었을 것이다. 현도군은 BC 75년경쯤 압록강 중류 쪽으로 물러간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고구려는 초기에는 비교적 엉성한 형태를 띠었겠지만 요동 지역에서는 하나의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때가 바로 BC 1세기말에서 AD 1세기 초에 해당할 것이다.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BC 1세기말 한나라의 쇠약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AD 1세기 초엽에 이르면 왕망이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이것이 신(新)나라이다. 철저한 유교정치가인 왕망은 중화사상의 실천과정의 하나로 중국 주변의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고구려 군을 동원하여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선비 또는 흉노를 제압하고 또 고구려와 같은 주변세력들의 약화를 도모하고자 했으나 이를 고구려왕(추)이 감지하고 거부하게 된다.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고구려를 정벌하러갔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죽음을 당하게 된다.


  결국 왕망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고구려왕 추는 장렬하게 전사하고 참수된 그의 목은 장안까지 압송됨으로써 파란만장했던 삶은 끝나게 된다. 여기에는 아마도 드라마에서와 같이 고구려후와의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고 부여 세력들의 조직적 개입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또 여기에 한족들의 성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도 있었을 것이다. 


  이상을 보면 실제로 ‘주몽’이라는 드라마에서 해모수(허준호분)로 나타나는 인물이 오히려 주몽의 실제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이 주몽(고구려후 추)의 죽음을 통해서 여러 가지 역사적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더욱 강한 군대를 유지하여야 부여와 한족들의 위협을 물리칠 수가 있으며 동족인 부여에 대해서는 철저한 응징과 보복만이 자신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다는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주①] 우선 주몽에 관한 이야기(고구려 건국신화)가 실린 책들을 보면 한국 측 자료로는『삼국사기』,『삼국유사』,『동명왕편(東明王篇)』등이 있고 중국 측 자료로는『위서(魏書)』,『양서(量書)』,『주서(周書)』,『수서(隨書)』,『북사(北史)』등이 있다. 오늘날 까지 전하는 동명왕신화의 기록들은 거의 대부분 고구려에 관한 것이며, 부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부여의 경우 북부여의 신화는 해모수신화이고, 동부여신화는 해부루 · 금와에 관한 신화라는 정도만 남아있다. 현재 MBC 드라마의 경우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주몽신화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인용되어 있는 『구삼국사(舊三國史)』의 주몽신화를 요약한 것인데 『위서(魏書)』와 거의 같다. 다만 주몽이 남으로 내려올 때 『위서』에는 두 사람(오인․오위)이고 『삼국사기』는 세 사람(오이․마리․협보) 등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중국 측 사서의 경우와 한국 측의 자료가 다소 차이가 있다. (『대쥬신을 찾아서』1권 11 참고) 구체적으로 『삼국사기』에는 『위서』에 없는 내용인 해모수신화(解慕漱神話)와 해부루신화(解扶婁神話)가 있다. 즉 『삼국사기』에는 부여왕 해부루가 자식이 없어 고민하다가 곤연(鯤淵)에서 금와(金蛙)를 얻은 후 동부여를 건국하는 해부루신화(解扶婁神話)와 유화 부인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관계하여 주몽을 잉태하는 해모수신화가 나타나있는데 중국 측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


[주②]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사계절 : 1999), 12쪽.

[주③] 이병주 『한국사고대편』진단학회편, 236쪽, 350쪽, 399쪽.

[주④] 김철준 「백제건국고」『백제연구』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1982) 9쪽.

[주⑤] 노태돈, 앞의책, 50쪽~53쪽, 92쪽~93쪽.

[주⑥]『漢書』「地理志」- 현도군 고구려현에 대한 주석.

[주⑦] 노태돈, 앞의책, 121쪽.

[주⑧] 노태돈, 앞의책, 107쪽.

[주⑨]『漢書』卷99 「王莽傳」始國四年

[주⑩] 노태돈, 앞의책, 59~60쪽.

[주⑪]『後漢書』「郡國志」.

[주⑫] “光武八年高句驪王遣使朝貢始稱王至殤安之間其王名宮”(『梁書』 高句麗傳 )

[주⑬] 임계순『청사』(신서원 : 2001).      

[주⑭]『滿文老檔』「太祖」;『滿洲實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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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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