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개인전에
알어? 몰러. 몰러? 알어.
시인 최돈선
나 이사람 잘 몰러. 매일 만나도 잘 몰러. 어제 본 듯 아님 작년에 본 듯, 그냥 그대로, 언제고 관음처럼 빙그레 미소 짓는 그 맘 나 잘 몰러.
하지만 이것만은 잘 알 것 같어.
이형재 이사람, 비록 성깔하나 없는 듯 비쳐 보이지만, 이 사람 가슴 속 가마솥엔 늘 눈바람 맞는 쇳물이 펄펄 끓고 있다는 것 말여.
그런데 묘하지. 그 쇳물이 영 뜨겁지 않거던? 아주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늘 따뜻하단 말이거던?
노골노골한, 무슨 엿가락 같은 그런 거란 말여. 말랑말랑한 찹살떡 같기도 하고 애들이 갖고 노는 찰흙 같기도 한 그런 거란 말여.
이형재는 하루 종일 그렇게 놀어.
늘 애들 맘으로 놀어.
그는 마당에다 가슴 속 쇳물을 쏟아 부어선 나무도 만들고 구름도 만들고 어느 땐 빛도 만들고 언덕도 만들어. 또 어느 땐 달도 해도 만들고 이웃집 소담네 계집애 젖꼭지도 만들어.
예전엔 꿈틀거리는 것들... 어찌 보면 지렁이 같기도 하고 누에 같기도 한 것들도 만들었어.
어느 때면 말여.
에밀레종 만들 듯이 제 살과 제 뼈를 깎을지도 몰러. 아니 지금도 그렇지 않은감?
하지만 그것들 모두, 그의 동심이 빚어낸 것 아니겠어?
손가락 하나로 하늘구름 삽뿍 찍어내어 얼굴에단 구리무 바르듯이 바르고, 땅의 온갖 잡것들 오줌냄새며 꿈틀꿈틀 기어가는 지렁이똥 냄새며, 또 천리 밖의 외로운 산사에서 전해오는 그 은은한 향불냄새를 흠흠흠 맡아, 그렇게 참고 기다리고 조물락거리고 꿈꾸어서 만들어낸것... 그것이 바로 그의 조각품인 거여, 알것어?
그것들은 모두가 그 만든 자리에서 비 맞고 바람 맞고 눈 맞아서, 풍화되어 침묵으로 견뎌 왔겄지. 그것들은 일분이 십년이 되고 한 시간이 천년이 되어 마침내 그 억겁을 그냥 그대로 살아왔는지도 몰러.
가만히 들여다 봐.
거기에 미륵이 오고 있잖여.
가만히 귀 기울여 봐.
거기 맨 첨에 우주를 울었던 아득한 생명의 소리 들리쟎여.
가만히 두드려 봐.
나무결에도 피가 흐르고 차거운 쇳냄새에도 강아지풀 눈 트쟎여.
들려? 들려? 무슨소리 들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구? 그렇겄지. 듣지 못하는 귀는 듣고, 들을 수 있는 귀는 듣지 못하겄지.
왠지 알어?
몰러? 그렇겄지.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참 지혜를 눈 뜨는 초발심 같은 것이니, 모르는 게 약인 거여.
너무 꼬치꼬치 캐묻고 알려고들 들지마.
무심인 거여. 이형재는 그냥 무심한 언덕을 선으로 그러놓고 그 위에 오롯이 앉아 팍팍한 세상을 냐려다 보고 있는 거란 말여.
그러니께 담배 한 대 말아피울 잠깐 참에 인생을 보고 자연의 흐름을 눈 감듯 관조하는 거겠지.
아마 이형재란 이 사람, 그 이전하곤 많이 변해 있는 듯, 아니면 어느것 하나 변하지 않은 듯....?
첫 번째 마당전에선 꿈틀거리던 벌레를 보여주더니, 두 번째 마당전에선 우주의 궁륭과 지향심 같은, 그리고 텅 빈 공간의 적요를 우리에게 보여주잖였어? 그런데 다섯 번째 마당인 이젠, 언덕과 지평과 흐르는 것과 또 다시 넘어야 태어나는 그리움의 공간들을 우리에게 들려주려 한단 말여.
생각해 보니 그건 보여주는 게 아니라 들려주는 것이여.
어찌 말하면 소리없는 소리, 그 뭐라나, 대상없는 기다림인지도 몰러. 또 어찌 보면 눈 감고 무심코, 세상 잃어버리는 건지도 몰러.
대체 이 사람에겐 예술적인 지랄병 같은, 광란의 피튀김이나 뒤틀림같은, 무슨 증오심이나 색깔있는 끼를 통 느끼지 못 하겠거던?
날카로운, 섬뜩한, 전율할, 제길 쌍용이나 퍼부을, 찢고 부수고 거꾸로 매달아 정육점 같은, 그런 환쟁이의 갈등이나 지랄같은 방황이 보이지가 않거던?
고여 있어 안으로 추스르며, 비어있어 숨어서 보이지 않는, 건들바람조차 쐬지 않는, 엎드려 축 늘어진 쇠불알 같은 그런 거란 말여.
그 이형재란 사람 어디 갔지? 하면 그는 어느 샌가 그가 빚은 나무 한 그루, 언덕 하나를 우리 앞에 슬쩍 놓아둔단 말여. 때론 꿈틀거리는 벌레로 남몰래 숨어 있다가 쉬엄쉬엄 기러가 언덕 위 흐르는 바람되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
어찌보면 무미건조한 듯이, 도 어찌 보면 다 깨달아 이젠 백치가 된 듯이, 썩은 나무둥치나 녹슨 쇠붙이로 남아 어디론가 날아가고픈 우화(羽化)의 꿈.
그래 그래.
구름이 토끼가 되고 토끼가 구름이 된다 한들 자연은 늘 그대로이고, 빛을 지닌이가 바로 어둠이 낳은 이임을 그 누군들 알겠냐만.... 다만 한 바람 이마에 스치우는 나뭇결 향내, 그 향내가 우리의 무지를 선뜩 깨우는 소리없는 <일갈!>이 될 수만 있다면, 우린 이형재의 그 깊고 깊은 맘 한 구석 오롯이 깃든, 정열의 빛 치열한 저항정신을 어찌 아니 느끼리.
그래 그래.
이형재는 구름인 거여. 새인 거여. 그저저도 아니면 쓸쓸한 언덕이거나 또 그도 아니면 눈이 빨간 토끼이거나.
이것들 모두가 두루두루 이형재의 맘 속에 살아있는 거란 말여.
알어?
몰러.
몰러?
알어.
그렇지. 그래. 이젠 이형재를 쬐끔은 알 것도 같구먼.
그냥 즐거운 거여, 즐거워 웃음이 나는 거여. 그 정신 그 땅을 울리고 그 손끝 그 하늘을 빚는 거란 말여.
누가 뭐래건 이형재는 자신과 끝없이 싸우면서 즐거워하는 거람 말여.
아무리 딱딱한 돌 속이라도 소롯이 연꽃을 피워내는 그런 거란 말여.
이젠 뭘 좀 알겠는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