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회 개인전에
우리에게 생명의 텅 빈 공간을
시인 최 돈 선
이형재!
언제나 부드러운 사람. 그리고 넉넉한 가슴과 미소를 지닌사람. 이것이 내가 그를 대했을 때의 첫 인상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나는 그가 한번도 성을 내거나 남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봊 적이 없다. 녹차를 즐기고, 찾아오는 손님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부탁을 제일처럼 열심히 보아주는 사람.
이형재를 만나면 항상 마음이 항상 고요해지고 평안하다. 그는 침묵으로 대화하는 心音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마음엔 하얀 민들레 꽃씨가 조용히 바람에 불려 날아간다. 아름답고 따뜻한 세계가 그의 나라이다.
내가 느끼기로는, 이형재는 한학이나 불교 계통에 깊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그는 한시를 짓고 노래부르기를 좋아한다. 어찌보면 그에겐 치열한 예술 활동을 멀리한 아웃사이더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그러한 나의 단견이 옳지 못함을 나는 깨달았다. 그의 외모가 풍기는 유연한 행동 속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눈’이 있었다.
거기에는 생각 이전의 오롯한 ‘존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형재는 그것을 ‘생장’이라고 표현했다. 내 나름대로 풀이하자면, 그것은 ‘탄생과 성장’이 아니겠는가.
한복을 즐겨 입으며 어린아이를 한없이 사랑하는 이형재는 ‘동심의 예술가’이다. 무엇인가 자꾸만 잃어져가는 오늘의 이 땅위에 진실과 사랑을 소중히 우리에게 담아 줄 예술가가 바로 이형재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대상을 만드는 작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대상을 드러내주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표현의 아름다움보다는 자연의 현상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그것은 생명의 소리이고, 아침 이슬처럼 반짝이는 생명의 빛이다.
이형재의 세계에는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비밀의 문답이 있다. 그건 철학적인 현학의 문답이 아니다. 나무 등걸같은, 그 껍질의 튼튼한 힘이 느껴지는 자연의 소리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의 소리는 언제나 흐른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사라지고,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초기에 그가 보여주었던 세계-1989년 2월 서울 청년미술관에서 가진 첫 개인전-에서는, 나무 등걸에서 꿈틀거리며 빠져나오는 애벌레가 주요한 모티브였다. 꿈틀거리는 것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들은 무엇이 되어 만날 것인가. 그것들이 꿈꾸는 세계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가지는 이러한 물음들은 살아있는 꿈틀거림으로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분명히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그의 메아리가 우리의 가슴을 울릴 때, 그 대답은 생명을 가진다. 생명은 무한히 움직이고 성장하고 다시 소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또 다시 텅빈 우주의 공간에서 시간과 함께 태어난다. 아니, 그 생며은 존재함이 아니라 전체의 無 이다. 無의 향기를 지닌 不在의 아름다움이다.
자, 여기서 우리는 이형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살아숨쉬기’를 연습해 보자. 당신이 현재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지금 누구인가.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조용히 마음의 문을 열고 느껴보라.
그러면 ‘그것’과 당신은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과 당신은 함께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작은 小品들이지만,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그 속에 숨어서 속삭이는 지를 귀 기울여 보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현상에 잇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없음’이다.
이형재는 ‘살아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새살을 어쩐지 튼튼하다.
땅거미지는 검줄로 매달리거나
탄생을 알리는 금줄이 되고, 혹은
싱싱한 풀밭에서 이슬을 말리운다.
낙엽서 솟아 등허리를 보이고 잠깐
묻혀선
다시 나와 부토가 되고 때로는
썩은 고목에서 환생 하나니
저 스스로 가는 곳을 보라.
그렇다. 이형재는 우리에게 생명의 텅 빈 공간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 공간에 우리의 시간이 존재한다. 흘러가는 시간의 저 멀리, 영원의 깨달은이 깊은 울림으로 살아 숨쉰다.
다소는 치기어린 장난끼로, 때론 거대한 穹隆의 질서로, 그리고 먼 먼 始原의 生靈으로 그는 우리를 인도 한다.
그의 예술은 따뜻한 어울림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유롭다. 그에겐 그 어떠한 거추장스러움도, 否定도, 닫힘도 없다. 그의 童心은 그리하여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寓話 한 토막을 들려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 잃어버린 이야기를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들려주고픈 마음이 그의 세계이가. 거기엔 고요한 미소가 있고, 흙의 진솔한 빚어냄이 있고, 은은한 생명의 향기가 있다.
저 스스로 가는 곳을 보라고 이형재는 말했다.
그 동심이 애벌레가 허물을 벗을 때, 우리는 羽化의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인가. 영혼의 파아란 핏줄이 흐르는 강으로 가서 귀먹은 귀로 그 강의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두 번째 개인전이 갖는 의미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이제 마악 허물벗기를 끝내고, 아침 햇살에 젖은 날개를 말리는 곤충의 기다림처럼 그는 설레인다. 영롱한 이슬방울을 튕겨내며 저 푸른 하늘을 날아오를 그의 힘찬 비상!
나는 이형재의 그 사랑 이야기를 언젠가 또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