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이야기

마음과 부처와 중생

차화로 2005. 2. 3. 18:12
마음과 부처와 중생

질문 ; 불교수행을 마음공부 또는 부처공부라고 하며,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음과 부처의 의미를 올바로 알면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음과 부처, 깨달음에 대하여 어떻게 요약하여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답변 ; 우주의 천지만물이 모두 마음에 속하므로 이 마음 저 마음 나눌 것이 없다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마음공부이고 부처공부입니다. 탐, 진, 치 삼독에 빠진 내가(我)가 근본마음을 가로막은 것만큼이 무명(無明)이고 중생입니다. 일월성신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본래 부처님(佛)이지만 인위적으로 작용을 일으키면 탐욕중생의 의지처가 되고 반드시 무너질 허망한 자산으로 둔갑하는 세상이치를 터득하여 분별과 탐착을 놓아버린 사람을 굳이 생불(生佛)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그릇된 마음으로 말미암아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의 육도(六道)를 떠도는 중생구제의 서원을 내려놓을 수 없어 팔만사천 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의 삶을 살게 되며, 이런 대자대비보살의 신통하고 자재한 능력은 무시무종의 깨달음이 그 원천이라고 합니다.

뜻을 통하면 마음 속에 이루어진 관념의 모양(相)을 버리게 됨으로서 깨달음의 해탈지견을 얻는 부처공부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과 깨쳐 이치를 터득한 사람은 만에 하나도 드물다고 합니다. 더더욱 그러한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삼생(三生)을 내리 닦아도 이치를 터득할 수 없다는 것이 분하고 억울하기 그지없지만 이참에 자비헌신으로 거짓의 나를 죽이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시발점인 독각(獨覺)을 꿈꿔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저 중국 당나라 때, 황벽희운선사(?~850)가 배휴라는 대부에게 부처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오직 한 마음일 뿐 다시 다른 법이란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긴 적도 없어진 적도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고 형태나 모양도 없으며, 유무(有無)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다거나 낡았다고 할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수량 이름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넘었다. 당체 그대로가 곧 옳은 것이니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바로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으니 끝이 없어서 가히 잴 수도 없다. 오직 이 한마음이 곧 부처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중생은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오히려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끝내 뜻을 이룰 수 없다. 중생은 생각을 쉬고 마음을 잊으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중생이라 해서 마음은 줄지 않으며,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내지는 육도만행(六度萬行)과 항하사 같은 공덕이 본래 스스로 다 갖추어져 있어서 닦고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믿지 않고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모두가 망상이니 도(道)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밝고 깨끗하여 마치 허공과 같아서 아무런 모습이 없다. 그러니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바로 법의 몸과 어긋나며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아득한 옛날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가 있는 것이니, 비롯함이 없는 옛날부터 차제있는 부처란 없다. 다만 한 마음을 깨치면 다시는 얻을만한 작은 법도 없으니, 이것이 곧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의 한 마음에는 다름이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으니, 거기에는 잡되거나 무너짐도 없고. 크나큰 태양과 같아서 온 누리를 다 비춘다. 해가 떠오르면 온 천하를 밝히더라도 허공은 밝아지지 않으며, 해가 졌을 때 온 천하를 어둡게 하더라도 허공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바라보는 관(觀)을 하며 깨끗함과 밝음과 해탈의 모양(相)을 짓는 다든가, 중생을 관하며 더러움과 어두움과 생사의 상을 떠올린다고 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자는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끝내 깨닫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모양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오직 한마음(一心)일 뿐 다시는 얻을 수 있는 티끌만한 법도 없으니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이다.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한마음 바탕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서 또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며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잘못된 법으로서 깨우침의 길[道]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화엄경}에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본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똑같다고 하였습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텅 비워 버리면 우주가 바로 나요 내가 바로 우주라는 것입니다. 나는 바로 우주의 일부이고 나라는 존재는 우주의 구성원이고 주인공이며 모든 생명의 주인인 샘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부처님으로 쓰면 부처님이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 쓰면 하나님이요, 우리의 마음을 알라로 쓰면 알신이요, 우리의 마음을 한울님으로 쓰면 한울님이요, 우리의 마음을 중생으로 쓰면 중생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작용에 따라 평화와 행복도 오고 분쟁과 불행도 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잘 쓰셔서 무상한 현실을 깨달음의 세계로 바꾸는 주인공이 되시길 빕니다.


-- 牛谷선원장의 글을 빌어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