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이야기
화엄경 해제 1 -법계연기와 일승보살도
차화로
2005. 7. 18. 19:03
1. 경전의 성립과 한역본
《화엄경》은 부처님이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표명한 경전인데, 중국에서 한역된 이래 교학적·사상적인 발전에 있어서 《법화경》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승경전 화엄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준말이다. 《화엄경》의 원래 범어 명칭은 알 수 없으며, 원본 범본이 Dasabhumika(다사부미카)라고 불리는 <십지품(十地品)>과 Gandavyuha(간다뷰하)라고 불리는 <입법계품(入法界品)>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대방광'이란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 원력과 자비, 신통과 위신력 등이 무한히 크고 반듯하고 넓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자각한 깨달음의 내용을 펴고 있기에 《화엄경》을 정각(正覺)의 개현경(開顯經)이라고도 한다.
《화엄경》의 제목에 대해서는 현재 세 가지로 재번역되고 있다. 즉 Maha Vaipulya Buddha Gandavyuha Sutra(마하 바이풀리야 붓다 간다뷰하 수트라, 대방광불화엄경), Buddha Vatamsaka(붓다 바탐사카, 불화엄경), Avatamsaka Sutra(아바탐사카 수트라, 화엄경) 등이다.
《화엄경》은 각각의 품이 따로 성립하였다가 뒤에 집대성된 것으로 본다. 가장 오래된 <십지품(十地品, '십지경'으로 독립됨)>은 1∼2세기 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경전의 성립사적으로 볼 때 대승불교 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시대에 편찬된 초기 대승경전으로서, 3∼4세기경 중앙아시아 코탄지방에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한 명 이상의 편집자들이 아마도 <십지품>과 <입법계품>에 영향을 받아서 초발심부터 깨달음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수행과정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는 방식으로 수 많은 독립경전들을 모았으며 이를 통해서 현존의 완성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엄경》자체 내에서는 경이 설해진 곳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수나무 아래로 설정하고, 설해진 시기는 성도하신 직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화엄경》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교설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승불설비불설 논쟁'에서 남방불교는 부처님 교설을 문자화한 아함부 계통의 경전을 제외한 대승경전은 모두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경전이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승불교 운동 과정에서 부처님의 교설과 근본정신을 새로이 편찬한 경전이기에 불설과 다름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한역본으로는 40권·60권·80권으로 된 《사십화엄》·《육십화엄》·《팔십화엄》 등 3부의 《화엄경》이 있다. 이 중 《사십화엄》은 <입법계품>만의 별역이기 때문에 통상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을 화엄경이라고 부른다.
《육십화엄》은 동진(東晋)시대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覺賢)에 의해 418∼420년에 번역되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되었다. 이를 진본(晋本) 또는 화엄경 중 먼저 번역되었다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 《팔십화엄》은 대주(大周)시대에 실차난타(實叉難陀)에 의해 695∼699년에 역출되었으니 이를 주본(周本)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 《사십화엄》은 당(唐)나라 때 반야(般若)가 795∼798년에 역출하였다. 그리고 9세기 말에 성립된 45품의 서장(티벳)어 화엄경도 현존하고 있다.
화엄부 경전으로는 법장(法藏, 643∼712)의《화엄경전기》를 보면 《도사경(陶師經)》[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과 광명각품(光明覺品), 지루가참(支婁迦懺) 역, 178∼179]·《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정행품(淨行品), 지도겸(支道謙) 역, 222∼228]·《여래홍현경(如來興顯經)》[60화엄의 32품인 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과 십인품(十忍品), 축법호(竺法護) 역, 291] 등을 위시하여 36부 150권의 지분경(支分經)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경은 그 역출 시기(2세기∼10세기)로 보아, 용수(龍樹, 150∼250?) 이전까지 <십지품>·<입법계품> 등을 비롯하여 상당수가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엄경》의 유통과정을 보면 《화엄경전기》에는 서역에서 전해졌다고 하였고, 《용수전》에는 용수보살이 바다에 들어가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용궁장래설이 있다. 이 설화는 용수 이전부터 있었던 《화엄경》을 용수가 비로소 크게 유통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용궁이란 용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에게서 유통되고 있었음을 뜻하기도 하고 남해지방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용수는 《화엄경》을 주석하여 《대부사의론(大不思議論)》100권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이는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불가사의해탈경》에 대한 주석이다.
또 용수의 저술로 되어 있는 것 중에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약찬게>가 있는데 줄여서 <화엄경약찬게(華嚴經略纂偈)>라고 부르는 것이다. <약찬게>는 《팔십화엄》의 조직과 구성을 간략히 엮어 놓은 게송으로서 현 한국불교교단에서 널리 독송되는 대표적인 염불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팔십화엄》의 유통은 <화엄경약찬게>의 수지독송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약찬게>는 우리 나라에서 지어진 것이 용수보살에게 가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주석서로는 세친(世親, 320∼400)의《십지경론(十地經論)》이 있으며, 지엄(智儼, 602∼668)의《화엄경수현기(華嚴經搜玄記)》와 법장(法藏, 643∼712)의《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가 '육십화엄'의 주석서로 유명하다. '팔십화엄'의 주석서로는 법장의《화엄경소(華嚴經疏)》, 이통현(李通玄, 635∼730)의《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 신수(神秀, ?∼706)의《화엄경소(華嚴經疏)》, 징관(澄觀, 737∼838)의《화엄경의초(華嚴經義 )》·《화엄경수소연의(華嚴經隨疏演義)》·《화엄경소주(華嚴經疏註)》, 종밀(宗密, 780∼841)의《화엄경논관(華嚴經論貫)》 등이 있다.
우리 나라 '육십화엄'의 주석서로는 신라 원효(元曉)의《화엄경소(華嚴經疏)》·《화엄경강목(華嚴經綱目)》·《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의상(義湘)의《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화엄경입법계품초기(華嚴經入法界品 記)》, 고려 보조(普照)의《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등이 있다. '팔십화엄'의 주석서로는 신라 대현(大賢)의《화엄경고적기(華嚴經古迹記)》, 표원(表員)의《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 고려 균여(均如)의《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화엄경탐현기석(華嚴經探玄記釋)》 등이 있다.
2. 경전의 형식과 구성
《화엄경》은 육십화엄의 경우는 7처 8회 34품, 팔십화엄은 7처 9회 39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처(處)는 경을 설한 장소를, 회(會)는 경을 설한 모임을 말하는데, 《팔십화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경의 설처는 지상에 세 곳이고 천상에 네 곳이며, 보광법당에서는 세 번 설해지고 있으므로 7처 9회이다.
각 회에 속하는 39품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회[6] 법보리장(法菩提場) : 세주묘엄품·여래현상품·보현삼매품·세계성취품·화장세계품·비로자나불품 / 2회[6] 보광명전(普光明殿) : 여래명호품·사성제품·광명각품·보살문명품·정행품·현수품 / 3회[6] 도리천궁( 利天宮) : 승수미산정품·수미정상게찬품·보살십주품·범행품·발심공덕품·명법품 / 4회[4] 야마천궁(夜摩天宮) : 불승야마천궁품·야마천궁게찬품·십행품·무진장품 / 5회[3] 도솔천궁(兜率天宮) : 불승도솔천궁품·도솔천궁게찬품·십회향품 / 6회[1] 타화자재천궁(他化自在天宮) : 십지품 / 7회[11] 보광명전 십정품·십통품·십인품·아승지품·수량품·제보살주처품·불부사의법품·여래십신상해품·여래수호광명공덕품·보현행품·여래출현품 / 8회[1] 보광명전 : 이세간품 / 9회[1]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 입법계품
<화엄경약찬게>에는 《팔십화엄》의 구조가 약술되어 있다.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이라는 표현은 바로 39품을 9회에 배치한 내용이다. 초회(법보리장) 6품의 설주(說主)는 보현보살로서 삼매에 입정하고 출정한 후에 부처님 세계[佛自內證境]를 설하고 있다. 제2회(보광명전, 6품)는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신(信)을 설하고 있다. 제3회(도리천궁, 6품)는 법혜보살이 십주법문을, 제4회(야마천궁, 4품)는 공덕림보살이 십행법문을, 제5회(도솔천궁, 3품)는 금강당보살이 십회향을, 그리고 제6회(타화자재천궁, 1품)는 금강장보살이 십지법문을 설하고 있다. 3회에서 6회까지 4회는 모두 천상에서 설하고 있으므로 천궁 4회라고도 불리며, 십지(十地)의 보살행(菩薩行)이 그 핵심내용이 된다. 다음 제7회(10품)는 다시 보광명전에서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의 계위에 해당하는 정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주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다. 보살도의 종국이 정각과 일치함을 거듭 지상의 보광명전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제8회(보광명전, 1품) 역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으며 보살도를 총괄하고 있다.
끝으로 마지막 제9회(기수급고독원, 1품)는 전편 8회와 대비하여 《화엄경》후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9회의 <입법계품>은 그 내용상 전편에서 보인 불자내증경과 보살도 및 구경지(究竟地)를 선재가 출현하여 재현시키고 있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하고 53선지식을 역참하여 보현행에 머물게 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경이 설해진 회처를 보면, '지상-천상-지상'으로 되어 있다. 처음 석존 성도의 장소인 법보리장과 보광법당에서 출발하여 점차 욕계(欲界) 6천 중의 도리천·야마천·도솔천·타화자재천으로 상승하였다가 다시 지상인 보광법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경은 전체적으로 보현보살[佛自內證境]→문수보살[信]→제보살[住·行·向·地]→보현보살[佛果行인 菩薩道]을 통하여 설해지고 있다.
설주와 설처 그리고 교설 내용 등에 따라 《화엄경》전체의 내용을 보면, 보현보살이 설주가 되어 보리수 아래와 보광명전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는 '보현경전계',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중생에게 신심을 일으키는 '문수경전계', 천궁의 4회에서 향상되는 보살도를 설하는 '십지경전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십주·십행·십회향의 삼현(三賢)은 십지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경》을 여래의 불세계를 보현보살을 통해서 보인 보현경전계, 중생을 발심케 하는 신(信)을 설하는 문수경전계, 보살도의 전개를 보인 천궁 4회의 십지경전계로 분류하기도 하는 것이다.
법장과 의상이 소의경전으로 삼은 《육십화엄》의 전체적인 구성은 《팔십화엄》과 대동소이하나 <보왕여래성기품>에 초점을 맞추어 여래출현의 성기(性起)를 중시한 점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여래출현(여래성기)의 사상을 가지고 문수경전계와 보현경전계를 결합하고 그 사이에 십지경전을 체계지은 것이 《육십화엄》 구성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즉, 문수와 보현을 시종(始終)으로 하는 보살도의 체계를 여래출현의 입장에서 조직한 것이라고 하겠다.
3. 경전의 중심 사상
3-1 화엄경의 중심사상
1) 여래출현(如來出現, 如來性起)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 먼저 '여래출현'을 들 수 있는데, 다른 표현은 '여래성기'이다. 《화엄경》의 대방광불은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한 편만불(遍滿佛)로서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이 아님이 없다. 즉, 모든 존재는 여래의 지혜와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이를 여래성기(如來性起)또는 여래출현(如來出現)이라고 한다.
화엄세계의 교주는 융삼세간(融三世間)·십신구족(十身具足)·삼불원융(三佛圓融)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른다. 화엄세계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보신(報身, 노사나불)·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이라 불리는 삼신불이 원융한 비로자나불의 세계이다.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비로자나부처님의 화현인 것이다.
화엄학에서는 일체 존재를 불·보살같이 깨달은 존재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아직 못 깨달은 존재인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그들이 의지해 있는 물질세계인 '기세간(器世間)'의 삼종세간으로 나누고 있다. 그 삼세간은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여 '융삼세간'이라 일컫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보살, 보살과 중생,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아니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가 비로자나 아님이 없으니, 기세간 역시 여래출현의 모습인 것이다. 이를 융삼세간불이라 한다.
《화엄경》에서는 일체를 열이라는 숫자로 보이고 있으며 열은 바로 원만수(圓滿數)를 의미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십불(十佛)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십불이 구족한 무애세계가 대방광불의 세계인 것이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도 화엄세계를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이라 읊고 있다. 이처럼 화엄세계는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불의 화현 아님이 없다.
《화엄경》은 우리 범부 중생이 그대로 부처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의상은 이를 법성성기(法性性起)로서 '예부터 부처'[舊來佛, 舊來不動名爲佛]라 하였다. 《화엄경》은 불세계를 교설한 것이니, 부처님 세계는 예부터 본래 부처인 중생의 원력에 의해 이 땅에 구현됨을 밝혀준 것이다.
2) 일승보살도(一乘菩薩道)
화엄이란 꽃으로 장엄하는 것이니, 바로 보살행이라는 꽃으로 불세계를 장엄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 '일승보살도'를 들 수 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세계는 광명으로만 나타나고[직접 교설은 두번], 주로 문수(文殊)·보현(普賢)보살을 위시한 보살들이 설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 보살들에 의해서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세계가 보살행을 통하여 장엄되며 우리 중생에게 펼쳐지고 있다. 보살이 설하고 있는 그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우리 범부 중생이 바로 부처의 삶을 살게 됨을 보이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범부와 보살과 부처가 다른 점은 발심(發心)에 있다. 나아가 중생이 스스로 부처인 줄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신심(信心)이란 자기가 부처인 줄을 확실히 믿는 것이며, 이를 정신(淨信)이라고 한다. 이러한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원력이 깊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신이 성취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발심한 중생이 보살이다. 보살이란 보리살타(BoddhiSattva)의 준말이니, 깨달을 중생 또는 깨달은 중생[覺有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화엄에서는 발심만 하면 바로 정각을 이룬다고 하여, 처음 발심할 때가 바로 정각을 성취하는 때임을[初發心時便成正覺]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시설하고 있는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성불로 향해가는 인행(因行)이라기보다, 정각 후의 과행(果行)이며 부처행[佛行]을 의미한다. 즉, 인·과가 둘이 아닌 인과교철(因果交徹)의 인행임과 동시에 과행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로자나부처님의 세계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구현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화엄경》에서의 보살행이다.
《화엄경》의 보살계위는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42위(位)이다. 이는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보살계위를 52위로 설정하는 것과 다르다. 《팔십화엄》에서 신(信)은 십신(十信)의 계위로 나타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보살도를 받치고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42계위의 첫 단계인 초발심주에서 발심하여 여래가에 태어나는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하나하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위한 연결 단계라기보다, 낱낱이 나름대로 독자적 가치를 지닌 이타행이며 동시에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면인 것이다. 이를 통해서 대승의 보살정신이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역참한 53선지식 낱낱의 해탈문도 모두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해탈문이다. 그리하여 선재의 구법은 구체적으로 불세계를 구현시켜 나가는 여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사상을 보살사상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십지행을 대표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화엄학에서 보살도를 말함에 있어 <십지품>을 <입법계품> 못지 않게 중시해 왔던 것이다.
3) 법계연기(法界緣起)
7세기 전후에 중국에서 대성한 화엄학의 근간이 법계연기론인데, '법계가 곧 연기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와 중생의 존재원리인 연기법[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 十二緣起 - 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을 화엄학의 교리로 조직한 것이다. 법계를 네 가지로 나누니, 첫째로 사법계(事法界)는 모든 차별되는 개체로 구성된 현상계이다. 둘째, 이법계(理法界)는 모든 개체 속에 일관되게 내재된 원리·법칙·보편적 진리와 같은 것을 드러내는 본체계이다. 셋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는 본체계와 현상계가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넷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개체와 개체마저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통합됨을 뜻한다.
연기법은 십이연기설에서부터 세 가지 측면으로 이해되어 왔다. 첫째가 연기의 법칙성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법칙성에 대한 무지인 무명(無明)에서 시작하여 죽음의 괴로움을 발생하는 과정[順觀]에 대한 것이다. 셋째는 법칙성에 대한 지혜를 회복함으로써 죽음의 괴로움이 극복되는 과정[逆觀]에 대한 것이다. 화엄학의 특징적인 사사무애법계는 즉, 일체의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相入] 하나 되어[相卽]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화엄학에서는 사사무애법계를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라고 표명하니, 화엄의 심오한 사상도 바로 연기법에 입각한 것이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법계 전체가 비로자나법신의 현현인 것이며, 여래성연기의 여래출현이기에 법계연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즉·상입의 사사무애법계를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설이다. 십현연기는 십현문(十玄門)이라고도 한다. 십은 원만구족의 수이고, 현은 현묘이며, 문은 사사무애법문이니, 열 가지 심오한 신비의 무애세계라는 의미이다. 간단하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 십현연기의 총설이다. 동시는 선후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고, 구족은 모수 섭수하여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체 제법이 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여 원만히 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②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 연기 제법에 각각 광협이 있으면서도 무애하다는 것이다. 이는 간격이 멀든 가깝든 간에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장애가 없이 서로 친교하다는 완전한 자유의 이론이다.
③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 하나와 전체가 서로 용납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전체에 들고[一入多],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어[多入一] 무애자재하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다.[一卽一切多卽一] 그러면서도 각각 저 나름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④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 모든 요소들이 서로 동일시되며 궁극적 차별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신과 타자의 동일시 속에서 서로 비춰보고 서로 동일시한 결과 함께 조화하여 움직인다.
⑤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 숨은 것(은밀)과 드러난 것(현료)은 본래가 함께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달은 반은 빛나고 반은 어둡지만 감춰진 반이 없는 것은 아니며, 달 자체가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이처럼 화엄은 총체적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가르치고 있다.
⑥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 미세란 지극히 작고 정묘하다는 의미이다. 하나가 능히 많은 것을 다 수용하니 상용이라 하고, 하나와 많은 것이 섞이지 않으므로 안립이라 한다. 무한세계가 작은 먼지나 티끌 속에 존재하며, 이들 세계의 일체 먼지 속에 또다시 무한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一微塵中含十方]
⑦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 인다라망의 비유에 의한 상호 반영의 이론이다. 제석천 그물의 각 보배구슬마다 서로 끝없이 비치는 것같이 법계의 일체도 중중무진하게 연기상유(緣起相由)하여 무애자재하다는 것이다.
⑧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 사실적인 설명으로서 진리를 밝히는 것이니, 모든 연기된 존재가 그대로 법계법문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당체가 그대로 연기 현전한 것이므로 두두물물이 다 비로자나법신이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⑨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각각 삼세가 있어 구세(九世)가 되고 그 구세는 한 생각 일념에 포섭되므로 십세이다. 그래서 일념이 십세무량겁이요 무량겁이 일념이며, 또 십세는 낱낱이 서로 혼잡함이 없이 완연히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⑩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 주체와 객체가 조화롭게 더불어 덕을 완성하는 경계이다. 우주법계에는 어느 한 사물도 스스로 혼자 생겨나거나 독립하여 존재함이 없이, 서로 주인이 되고 객이 되어 모든 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육상원융설은 십현연기와 함께 화엄의 무진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또 다른 측면이다. 육상이란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을 말한다. 풀이하면 전체인 모양·각각인 모양·같은 모양·다른 모양·이루는 모양·무너지는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보편성·특수성·유사성·다양성·통합성·차별성을 뜻하면서, 차례대로 둘씩 묶으면 체(體)·상(相)·용(用)의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육상원융은 '총별·동이·성괴'라는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이나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한 관계에 놓여 있어서, 전체와 부분 및 부분과 부분이 원만하게 융화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고, 여섯이 서로 다른 모습을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원융무애하게 법계연기가 성립한다는 설이다.
세친이《십지경론》에서,《십지경》경문 자체에는 설명이 없었던 육상에 대한 해석을 함으로써 육상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즉, 보살이 십지의 보살도와 바라밀을 닦아서 마음을 증장케 하는 보살행의 방편으로 세친은 육상을 설명한 것이다. 화엄의 보살행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여 본래 구족된 불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세친의 '육상론'은 이후 화엄가들이 육상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었다.
3-2. 화엄종의 교판
중국 화엄종의 초조는 두순(杜順, 557∼640)이고 2조는 지엄(智嚴, 602∼668)이다. 지엄의 문하였던 의상(義湘)은 신라에 화엄종을 일으켰으며, 당(唐)의 현수 법장(賢首 法藏, 643∼712)이 중국 화엄종의 개창자자 된 것이다. 화엄종은 《화엄경》이 소의경전이며,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사상과 더불어 중국불교사의 쌍벽을 이루었다.
화엄의 인간관은 성기설(性起, 모든 존재는 여래의 성품이 발현한 것)로 볼 때 인간마음의 청정한 부분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천태의 성구설[性具說 : 一念三千 - 일념 가운데 삼천의 세계가 갖추어진다는 천태종의 근본적인 세계관, 三諦圓融 - 일심삼관인 空·假·中諦의 삼제가 원융]은 중생은 선악을 겸비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천태종은 중생이 본래 지닌 여래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실천을 강조한다. 상대적으로 화엄종은 인간 마음의 청정한 부분을 강조하므로 연화장세계의 이상향을 제시하며, 실천보다는 관념적인 이론이 중시되는 측면이 있다.
법장이 《화엄경》을 중심으로 조직한 화엄교판은 동별이교판(同別二敎判)과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이다.
1) 동별이교판(同別二敎判)
화엄교학에서는 일승(一乘)을 나누어 동교일승과 별교일승으로 한다. 양거(羊車)·녹거(鹿車)·우거(牛車)로 비유되는 성문(聲聞)승·연각(緣覺)승·보살(菩薩)승의 삼승(三乘)에 대하여 대백우거(大白牛車)의 일불승이 수승함은 법화와 화엄에서 공통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그래서 천태교판에서도 화엄과 법화를 모두 일승원교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에서는 이 일승을 다시 동교와 별교로 나누어서, 법화는 동교일승에 해당시키고 화엄만을 별교일승으로 교판하고 있다. 동교는 일승과 삼승이 융회(融會)해서 같다는 의미이다. 일승이 삼승에 동(同)하고 삼승이 일승에 동한다는 말이다. 일승이 삼승에 동한다는 말은 일불승을 분별하여 셋으로 한다고 하는, 일승에서 삼승이 흘러나옴을 의미하는 향하(向下)적 방면의 동교이다. 일승이 능동(能同), 삼승이 소동(所同)인 것이다. 삼승이 일승에 동한다는 것은 회삼귀일의 향상(向上)적 방면인 동교이다.
별교는 삼승이 별이(別異)하다는 의미로서, 삼승 차별의 교의를 초월하여 독자의 지위를 가지는 절대의 일승으로 설명된다. 행하고 보이는 것이 다 일승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일승이 삼승을 초월해 있다는 것은 삼승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삼승을 다 포섭해서 하나의 교의를 형성하고 있는 곳에 일승의 절대적 의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일승이 삼승을 완전히 포섭하고 있으므로 삼승은 일승에 녹아 형체와 그림자도 볼 수 없다. 따라서 일승과 삼승은 하나가 아니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승이 삼승과의 대립을 초월하면서도 삼승을 포함하는 방면을 별교일승이라 하여, 법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승과 삼승을 융합해서 온전히 하나[全一]로서의 불교로 파악하려 하였다. 그러면서도 동별이교판에서는 분명히 깊고 얕음을 인정해서 동교일승은 삼승을 회통한 일승이라서 아직도 삼승에 상대하는 입장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해 별교일승은 삼승에 대립한 일승이 아니라 삼승을 포함하는 절대의 견지에 입각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천태교의를 차삼(遮三)의 동교라 하고, 화엄을 직현(直顯)의 별교라 하여 화엄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2)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
법장은 다시 일승이 삼승보다 수승한 이유를 오교십종판에서 밝히고 있다. 오교판은 법(法)을 오교에 분류한 것이고, 십종판은 이(理)를 십종으로 분류한 것이다.
먼저 오교는 소승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敎)·종교(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이다.
①소승교 -《아함경(阿含經)》·《비바사론(毘婆沙論)》·《구사론(俱舍論)》등의 설로서 인공(人空)을 설할 뿐이고 법공(法空)을 시현하지 못하므로 대승에서 이를 소승이라 낮추어 부른 것이다.
②대승시교 - 대승의 첫문에 해당한다고 하여 초교라고도 한다. 이에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가 있다. 상시교는 아뢰야연기의 유식설, 공시교는 중관설에 해당한다.
③종교 - 대승종극의 의미로서 숙교(熟敎)라고도 하며 여래장연기설에 해당한다.
④돈교 - 언설과 계위를 세우지 않는 돈오돈증(頓成頓證)하는 의미이다. 연설이 문득 끊어지고 근본자성이 나타나며 해와 행이 몰록 이루어져 일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부처님과 같은 것이다. 일념도 내지 않으므로 불(佛)이고 계위도 세우지 않으므로 돈(頓)이다. 그래서 직현인 불이법문의 유마경설이 이에 해당한다. 지엄은 화엄을 돈교에도 일분 포섭시켰으나 법장은 완전히 다음의 원교에만 해당시켰다. 후에는 선종도 이 돈교에 포섭시켰다.
⑤원교 - 교리행과(敎理行果)가 모두 원융무애하고 자재무진(自在無盡)인 교설이다. 삼승을 융섭하기 위하여 동교를 내세웠으나, 원교의 주된 바는 별교이다. 《화엄경》이 이에 해당한다.
다음 십종판은 오교에서 담고 있는 이치에 의해 10종으로 분류한 것이다.
①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 - 인·법 모두 유(有)라 설하는 종으로서 독자부 등의 설이다. 이를 불법 내 외도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아(我)도 있다고 생각하므로 외도라고 지칭한 것이다.
②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 - 아(我)는 무(無)이나 법(法)은 삼세에 실유(實有)한다고 설하는 것으로서 설일체유부가 이에 속한다.
③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 - 과거와 미래의 법은 법체가 없고 현재의 제법만이 유(有)라는 종으로서 대중부가 이에 속한다.
④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 - 현재법 중에도 가와 실이 있다고 설하는 설가부 같은 것이다.
⑤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 - 속제는 허망하고 진제는 진실이라고 설하는 것인데 설출세부 같은 것이다.
⑥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 - 일체 법은 다만 이름 뿐이요 실유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인데 일설부 같은 것이다. 이상은 소승교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류의 기준은 무엇보다도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얼마나 이해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이해한 정도에 따라 소승의 이치를 분류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제법개공을 온전히 다 이해하면 대승으로 들어가게 된다.
⑦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 - 일체 법은 다 진공이라고 설하는 것인데, 대승시교 중의 공시교에 해당하는 《반야경》·《중론》·《십이문론》 등이 이것이다.
⑧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 일체 법은 오직 진여로부터 연기하며, 진여는 공하지 않고 만덕을 구족한다는 뜻으로 종교에 해당한다.
⑨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 소연상(所然相)과 능연상(能然相)이 함께 끊어진 무념무상의 절언(絶言) 경계로서 돈교에 해당한다.
⑩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 - 낱낱 사법(事法)은 다 일체의 공덕을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주반구족(主伴具足)하고 무진자재함을 현현하는 별교일승의 법문이다.
법장은 법계연기를 밝히기 위해 유식, 중관, 여래장사상를 차용하였다. 화엄교판에서는 대승시교에 유식과 중관을, 종교에 여래장사상을 배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엄이 돈교와 원교에 화엄을 나누어 포섭시키고 있는 것과 달리, 법장은 오로지 별교일승과 원교에만 화엄을 배속시킴으로써 화엄종을 최고의 자리로 굳히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표명한 경전인데, 중국에서 한역된 이래 교학적·사상적인 발전에 있어서 《법화경》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승경전 화엄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준말이다. 《화엄경》의 원래 범어 명칭은 알 수 없으며, 원본 범본이 Dasabhumika(다사부미카)라고 불리는 <십지품(十地品)>과 Gandavyuha(간다뷰하)라고 불리는 <입법계품(入法界品)>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대방광'이란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 원력과 자비, 신통과 위신력 등이 무한히 크고 반듯하고 넓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자각한 깨달음의 내용을 펴고 있기에 《화엄경》을 정각(正覺)의 개현경(開顯經)이라고도 한다.
《화엄경》의 제목에 대해서는 현재 세 가지로 재번역되고 있다. 즉 Maha Vaipulya Buddha Gandavyuha Sutra(마하 바이풀리야 붓다 간다뷰하 수트라, 대방광불화엄경), Buddha Vatamsaka(붓다 바탐사카, 불화엄경), Avatamsaka Sutra(아바탐사카 수트라, 화엄경) 등이다.
《화엄경》은 각각의 품이 따로 성립하였다가 뒤에 집대성된 것으로 본다. 가장 오래된 <십지품(十地品, '십지경'으로 독립됨)>은 1∼2세기 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경전의 성립사적으로 볼 때 대승불교 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시대에 편찬된 초기 대승경전으로서, 3∼4세기경 중앙아시아 코탄지방에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한 명 이상의 편집자들이 아마도 <십지품>과 <입법계품>에 영향을 받아서 초발심부터 깨달음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수행과정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는 방식으로 수 많은 독립경전들을 모았으며 이를 통해서 현존의 완성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엄경》자체 내에서는 경이 설해진 곳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수나무 아래로 설정하고, 설해진 시기는 성도하신 직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화엄경》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교설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승불설비불설 논쟁'에서 남방불교는 부처님 교설을 문자화한 아함부 계통의 경전을 제외한 대승경전은 모두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경전이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승불교 운동 과정에서 부처님의 교설과 근본정신을 새로이 편찬한 경전이기에 불설과 다름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한역본으로는 40권·60권·80권으로 된 《사십화엄》·《육십화엄》·《팔십화엄》 등 3부의 《화엄경》이 있다. 이 중 《사십화엄》은 <입법계품>만의 별역이기 때문에 통상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을 화엄경이라고 부른다.
《육십화엄》은 동진(東晋)시대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覺賢)에 의해 418∼420년에 번역되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되었다. 이를 진본(晋本) 또는 화엄경 중 먼저 번역되었다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 《팔십화엄》은 대주(大周)시대에 실차난타(實叉難陀)에 의해 695∼699년에 역출되었으니 이를 주본(周本)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 《사십화엄》은 당(唐)나라 때 반야(般若)가 795∼798년에 역출하였다. 그리고 9세기 말에 성립된 45품의 서장(티벳)어 화엄경도 현존하고 있다.
화엄부 경전으로는 법장(法藏, 643∼712)의《화엄경전기》를 보면 《도사경(陶師經)》[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과 광명각품(光明覺品), 지루가참(支婁迦懺) 역, 178∼179]·《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정행품(淨行品), 지도겸(支道謙) 역, 222∼228]·《여래홍현경(如來興顯經)》[60화엄의 32품인 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과 십인품(十忍品), 축법호(竺法護) 역, 291] 등을 위시하여 36부 150권의 지분경(支分經)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경은 그 역출 시기(2세기∼10세기)로 보아, 용수(龍樹, 150∼250?) 이전까지 <십지품>·<입법계품> 등을 비롯하여 상당수가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엄경》의 유통과정을 보면 《화엄경전기》에는 서역에서 전해졌다고 하였고, 《용수전》에는 용수보살이 바다에 들어가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용궁장래설이 있다. 이 설화는 용수 이전부터 있었던 《화엄경》을 용수가 비로소 크게 유통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용궁이란 용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에게서 유통되고 있었음을 뜻하기도 하고 남해지방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용수는 《화엄경》을 주석하여 《대부사의론(大不思議論)》100권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이는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불가사의해탈경》에 대한 주석이다.
또 용수의 저술로 되어 있는 것 중에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약찬게>가 있는데 줄여서 <화엄경약찬게(華嚴經略纂偈)>라고 부르는 것이다. <약찬게>는 《팔십화엄》의 조직과 구성을 간략히 엮어 놓은 게송으로서 현 한국불교교단에서 널리 독송되는 대표적인 염불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팔십화엄》의 유통은 <화엄경약찬게>의 수지독송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약찬게>는 우리 나라에서 지어진 것이 용수보살에게 가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주석서로는 세친(世親, 320∼400)의《십지경론(十地經論)》이 있으며, 지엄(智儼, 602∼668)의《화엄경수현기(華嚴經搜玄記)》와 법장(法藏, 643∼712)의《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가 '육십화엄'의 주석서로 유명하다. '팔십화엄'의 주석서로는 법장의《화엄경소(華嚴經疏)》, 이통현(李通玄, 635∼730)의《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 신수(神秀, ?∼706)의《화엄경소(華嚴經疏)》, 징관(澄觀, 737∼838)의《화엄경의초(華嚴經義 )》·《화엄경수소연의(華嚴經隨疏演義)》·《화엄경소주(華嚴經疏註)》, 종밀(宗密, 780∼841)의《화엄경논관(華嚴經論貫)》 등이 있다.
우리 나라 '육십화엄'의 주석서로는 신라 원효(元曉)의《화엄경소(華嚴經疏)》·《화엄경강목(華嚴經綱目)》·《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의상(義湘)의《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화엄경입법계품초기(華嚴經入法界品 記)》, 고려 보조(普照)의《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등이 있다. '팔십화엄'의 주석서로는 신라 대현(大賢)의《화엄경고적기(華嚴經古迹記)》, 표원(表員)의《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 고려 균여(均如)의《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화엄경탐현기석(華嚴經探玄記釋)》 등이 있다.
2. 경전의 형식과 구성
《화엄경》은 육십화엄의 경우는 7처 8회 34품, 팔십화엄은 7처 9회 39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처(處)는 경을 설한 장소를, 회(會)는 경을 설한 모임을 말하는데, 《팔십화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경의 설처는 지상에 세 곳이고 천상에 네 곳이며, 보광법당에서는 세 번 설해지고 있으므로 7처 9회이다.
각 회에 속하는 39품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회[6] 법보리장(法菩提場) : 세주묘엄품·여래현상품·보현삼매품·세계성취품·화장세계품·비로자나불품 / 2회[6] 보광명전(普光明殿) : 여래명호품·사성제품·광명각품·보살문명품·정행품·현수품 / 3회[6] 도리천궁( 利天宮) : 승수미산정품·수미정상게찬품·보살십주품·범행품·발심공덕품·명법품 / 4회[4] 야마천궁(夜摩天宮) : 불승야마천궁품·야마천궁게찬품·십행품·무진장품 / 5회[3] 도솔천궁(兜率天宮) : 불승도솔천궁품·도솔천궁게찬품·십회향품 / 6회[1] 타화자재천궁(他化自在天宮) : 십지품 / 7회[11] 보광명전 십정품·십통품·십인품·아승지품·수량품·제보살주처품·불부사의법품·여래십신상해품·여래수호광명공덕품·보현행품·여래출현품 / 8회[1] 보광명전 : 이세간품 / 9회[1]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 입법계품
<화엄경약찬게>에는 《팔십화엄》의 구조가 약술되어 있다.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이라는 표현은 바로 39품을 9회에 배치한 내용이다. 초회(법보리장) 6품의 설주(說主)는 보현보살로서 삼매에 입정하고 출정한 후에 부처님 세계[佛自內證境]를 설하고 있다. 제2회(보광명전, 6품)는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신(信)을 설하고 있다. 제3회(도리천궁, 6품)는 법혜보살이 십주법문을, 제4회(야마천궁, 4품)는 공덕림보살이 십행법문을, 제5회(도솔천궁, 3품)는 금강당보살이 십회향을, 그리고 제6회(타화자재천궁, 1품)는 금강장보살이 십지법문을 설하고 있다. 3회에서 6회까지 4회는 모두 천상에서 설하고 있으므로 천궁 4회라고도 불리며, 십지(十地)의 보살행(菩薩行)이 그 핵심내용이 된다. 다음 제7회(10품)는 다시 보광명전에서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의 계위에 해당하는 정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주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다. 보살도의 종국이 정각과 일치함을 거듭 지상의 보광명전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제8회(보광명전, 1품) 역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으며 보살도를 총괄하고 있다.
끝으로 마지막 제9회(기수급고독원, 1품)는 전편 8회와 대비하여 《화엄경》후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9회의 <입법계품>은 그 내용상 전편에서 보인 불자내증경과 보살도 및 구경지(究竟地)를 선재가 출현하여 재현시키고 있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하고 53선지식을 역참하여 보현행에 머물게 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경이 설해진 회처를 보면, '지상-천상-지상'으로 되어 있다. 처음 석존 성도의 장소인 법보리장과 보광법당에서 출발하여 점차 욕계(欲界) 6천 중의 도리천·야마천·도솔천·타화자재천으로 상승하였다가 다시 지상인 보광법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경은 전체적으로 보현보살[佛自內證境]→문수보살[信]→제보살[住·行·向·地]→보현보살[佛果行인 菩薩道]을 통하여 설해지고 있다.
설주와 설처 그리고 교설 내용 등에 따라 《화엄경》전체의 내용을 보면, 보현보살이 설주가 되어 보리수 아래와 보광명전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는 '보현경전계',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중생에게 신심을 일으키는 '문수경전계', 천궁의 4회에서 향상되는 보살도를 설하는 '십지경전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십주·십행·십회향의 삼현(三賢)은 십지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경》을 여래의 불세계를 보현보살을 통해서 보인 보현경전계, 중생을 발심케 하는 신(信)을 설하는 문수경전계, 보살도의 전개를 보인 천궁 4회의 십지경전계로 분류하기도 하는 것이다.
법장과 의상이 소의경전으로 삼은 《육십화엄》의 전체적인 구성은 《팔십화엄》과 대동소이하나 <보왕여래성기품>에 초점을 맞추어 여래출현의 성기(性起)를 중시한 점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여래출현(여래성기)의 사상을 가지고 문수경전계와 보현경전계를 결합하고 그 사이에 십지경전을 체계지은 것이 《육십화엄》 구성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즉, 문수와 보현을 시종(始終)으로 하는 보살도의 체계를 여래출현의 입장에서 조직한 것이라고 하겠다.
3. 경전의 중심 사상
3-1 화엄경의 중심사상
1) 여래출현(如來出現, 如來性起)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 먼저 '여래출현'을 들 수 있는데, 다른 표현은 '여래성기'이다. 《화엄경》의 대방광불은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한 편만불(遍滿佛)로서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이 아님이 없다. 즉, 모든 존재는 여래의 지혜와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이를 여래성기(如來性起)또는 여래출현(如來出現)이라고 한다.
화엄세계의 교주는 융삼세간(融三世間)·십신구족(十身具足)·삼불원융(三佛圓融)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른다. 화엄세계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보신(報身, 노사나불)·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이라 불리는 삼신불이 원융한 비로자나불의 세계이다.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비로자나부처님의 화현인 것이다.
화엄학에서는 일체 존재를 불·보살같이 깨달은 존재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아직 못 깨달은 존재인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그들이 의지해 있는 물질세계인 '기세간(器世間)'의 삼종세간으로 나누고 있다. 그 삼세간은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여 '융삼세간'이라 일컫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보살, 보살과 중생,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아니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가 비로자나 아님이 없으니, 기세간 역시 여래출현의 모습인 것이다. 이를 융삼세간불이라 한다.
《화엄경》에서는 일체를 열이라는 숫자로 보이고 있으며 열은 바로 원만수(圓滿數)를 의미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십불(十佛)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십불이 구족한 무애세계가 대방광불의 세계인 것이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도 화엄세계를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이라 읊고 있다. 이처럼 화엄세계는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불의 화현 아님이 없다.
《화엄경》은 우리 범부 중생이 그대로 부처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의상은 이를 법성성기(法性性起)로서 '예부터 부처'[舊來佛, 舊來不動名爲佛]라 하였다. 《화엄경》은 불세계를 교설한 것이니, 부처님 세계는 예부터 본래 부처인 중생의 원력에 의해 이 땅에 구현됨을 밝혀준 것이다.
2) 일승보살도(一乘菩薩道)
화엄이란 꽃으로 장엄하는 것이니, 바로 보살행이라는 꽃으로 불세계를 장엄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 '일승보살도'를 들 수 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세계는 광명으로만 나타나고[직접 교설은 두번], 주로 문수(文殊)·보현(普賢)보살을 위시한 보살들이 설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 보살들에 의해서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세계가 보살행을 통하여 장엄되며 우리 중생에게 펼쳐지고 있다. 보살이 설하고 있는 그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우리 범부 중생이 바로 부처의 삶을 살게 됨을 보이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범부와 보살과 부처가 다른 점은 발심(發心)에 있다. 나아가 중생이 스스로 부처인 줄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신심(信心)이란 자기가 부처인 줄을 확실히 믿는 것이며, 이를 정신(淨信)이라고 한다. 이러한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원력이 깊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신이 성취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발심한 중생이 보살이다. 보살이란 보리살타(BoddhiSattva)의 준말이니, 깨달을 중생 또는 깨달은 중생[覺有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화엄에서는 발심만 하면 바로 정각을 이룬다고 하여, 처음 발심할 때가 바로 정각을 성취하는 때임을[初發心時便成正覺]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시설하고 있는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성불로 향해가는 인행(因行)이라기보다, 정각 후의 과행(果行)이며 부처행[佛行]을 의미한다. 즉, 인·과가 둘이 아닌 인과교철(因果交徹)의 인행임과 동시에 과행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로자나부처님의 세계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구현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화엄경》에서의 보살행이다.
《화엄경》의 보살계위는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42위(位)이다. 이는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보살계위를 52위로 설정하는 것과 다르다. 《팔십화엄》에서 신(信)은 십신(十信)의 계위로 나타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보살도를 받치고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42계위의 첫 단계인 초발심주에서 발심하여 여래가에 태어나는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하나하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위한 연결 단계라기보다, 낱낱이 나름대로 독자적 가치를 지닌 이타행이며 동시에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면인 것이다. 이를 통해서 대승의 보살정신이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역참한 53선지식 낱낱의 해탈문도 모두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해탈문이다. 그리하여 선재의 구법은 구체적으로 불세계를 구현시켜 나가는 여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사상을 보살사상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십지행을 대표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화엄학에서 보살도를 말함에 있어 <십지품>을 <입법계품> 못지 않게 중시해 왔던 것이다.
3) 법계연기(法界緣起)
7세기 전후에 중국에서 대성한 화엄학의 근간이 법계연기론인데, '법계가 곧 연기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와 중생의 존재원리인 연기법[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 十二緣起 - 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을 화엄학의 교리로 조직한 것이다. 법계를 네 가지로 나누니, 첫째로 사법계(事法界)는 모든 차별되는 개체로 구성된 현상계이다. 둘째, 이법계(理法界)는 모든 개체 속에 일관되게 내재된 원리·법칙·보편적 진리와 같은 것을 드러내는 본체계이다. 셋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는 본체계와 현상계가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넷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개체와 개체마저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통합됨을 뜻한다.
연기법은 십이연기설에서부터 세 가지 측면으로 이해되어 왔다. 첫째가 연기의 법칙성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법칙성에 대한 무지인 무명(無明)에서 시작하여 죽음의 괴로움을 발생하는 과정[順觀]에 대한 것이다. 셋째는 법칙성에 대한 지혜를 회복함으로써 죽음의 괴로움이 극복되는 과정[逆觀]에 대한 것이다. 화엄학의 특징적인 사사무애법계는 즉, 일체의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相入] 하나 되어[相卽]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화엄학에서는 사사무애법계를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라고 표명하니, 화엄의 심오한 사상도 바로 연기법에 입각한 것이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법계 전체가 비로자나법신의 현현인 것이며, 여래성연기의 여래출현이기에 법계연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즉·상입의 사사무애법계를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설이다. 십현연기는 십현문(十玄門)이라고도 한다. 십은 원만구족의 수이고, 현은 현묘이며, 문은 사사무애법문이니, 열 가지 심오한 신비의 무애세계라는 의미이다. 간단하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 십현연기의 총설이다. 동시는 선후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고, 구족은 모수 섭수하여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체 제법이 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여 원만히 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②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 연기 제법에 각각 광협이 있으면서도 무애하다는 것이다. 이는 간격이 멀든 가깝든 간에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장애가 없이 서로 친교하다는 완전한 자유의 이론이다.
③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 하나와 전체가 서로 용납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전체에 들고[一入多],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어[多入一] 무애자재하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다.[一卽一切多卽一] 그러면서도 각각 저 나름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④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 모든 요소들이 서로 동일시되며 궁극적 차별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신과 타자의 동일시 속에서 서로 비춰보고 서로 동일시한 결과 함께 조화하여 움직인다.
⑤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 숨은 것(은밀)과 드러난 것(현료)은 본래가 함께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달은 반은 빛나고 반은 어둡지만 감춰진 반이 없는 것은 아니며, 달 자체가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이처럼 화엄은 총체적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가르치고 있다.
⑥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 미세란 지극히 작고 정묘하다는 의미이다. 하나가 능히 많은 것을 다 수용하니 상용이라 하고, 하나와 많은 것이 섞이지 않으므로 안립이라 한다. 무한세계가 작은 먼지나 티끌 속에 존재하며, 이들 세계의 일체 먼지 속에 또다시 무한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一微塵中含十方]
⑦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 인다라망의 비유에 의한 상호 반영의 이론이다. 제석천 그물의 각 보배구슬마다 서로 끝없이 비치는 것같이 법계의 일체도 중중무진하게 연기상유(緣起相由)하여 무애자재하다는 것이다.
⑧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 사실적인 설명으로서 진리를 밝히는 것이니, 모든 연기된 존재가 그대로 법계법문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당체가 그대로 연기 현전한 것이므로 두두물물이 다 비로자나법신이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⑨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각각 삼세가 있어 구세(九世)가 되고 그 구세는 한 생각 일념에 포섭되므로 십세이다. 그래서 일념이 십세무량겁이요 무량겁이 일념이며, 또 십세는 낱낱이 서로 혼잡함이 없이 완연히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⑩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 주체와 객체가 조화롭게 더불어 덕을 완성하는 경계이다. 우주법계에는 어느 한 사물도 스스로 혼자 생겨나거나 독립하여 존재함이 없이, 서로 주인이 되고 객이 되어 모든 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육상원융설은 십현연기와 함께 화엄의 무진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또 다른 측면이다. 육상이란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을 말한다. 풀이하면 전체인 모양·각각인 모양·같은 모양·다른 모양·이루는 모양·무너지는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보편성·특수성·유사성·다양성·통합성·차별성을 뜻하면서, 차례대로 둘씩 묶으면 체(體)·상(相)·용(用)의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육상원융은 '총별·동이·성괴'라는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이나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한 관계에 놓여 있어서, 전체와 부분 및 부분과 부분이 원만하게 융화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고, 여섯이 서로 다른 모습을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원융무애하게 법계연기가 성립한다는 설이다.
세친이《십지경론》에서,《십지경》경문 자체에는 설명이 없었던 육상에 대한 해석을 함으로써 육상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즉, 보살이 십지의 보살도와 바라밀을 닦아서 마음을 증장케 하는 보살행의 방편으로 세친은 육상을 설명한 것이다. 화엄의 보살행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여 본래 구족된 불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세친의 '육상론'은 이후 화엄가들이 육상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었다.
3-2. 화엄종의 교판
중국 화엄종의 초조는 두순(杜順, 557∼640)이고 2조는 지엄(智嚴, 602∼668)이다. 지엄의 문하였던 의상(義湘)은 신라에 화엄종을 일으켰으며, 당(唐)의 현수 법장(賢首 法藏, 643∼712)이 중국 화엄종의 개창자자 된 것이다. 화엄종은 《화엄경》이 소의경전이며,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사상과 더불어 중국불교사의 쌍벽을 이루었다.
화엄의 인간관은 성기설(性起, 모든 존재는 여래의 성품이 발현한 것)로 볼 때 인간마음의 청정한 부분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천태의 성구설[性具說 : 一念三千 - 일념 가운데 삼천의 세계가 갖추어진다는 천태종의 근본적인 세계관, 三諦圓融 - 일심삼관인 空·假·中諦의 삼제가 원융]은 중생은 선악을 겸비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천태종은 중생이 본래 지닌 여래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실천을 강조한다. 상대적으로 화엄종은 인간 마음의 청정한 부분을 강조하므로 연화장세계의 이상향을 제시하며, 실천보다는 관념적인 이론이 중시되는 측면이 있다.
법장이 《화엄경》을 중심으로 조직한 화엄교판은 동별이교판(同別二敎判)과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이다.
1) 동별이교판(同別二敎判)
화엄교학에서는 일승(一乘)을 나누어 동교일승과 별교일승으로 한다. 양거(羊車)·녹거(鹿車)·우거(牛車)로 비유되는 성문(聲聞)승·연각(緣覺)승·보살(菩薩)승의 삼승(三乘)에 대하여 대백우거(大白牛車)의 일불승이 수승함은 법화와 화엄에서 공통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그래서 천태교판에서도 화엄과 법화를 모두 일승원교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에서는 이 일승을 다시 동교와 별교로 나누어서, 법화는 동교일승에 해당시키고 화엄만을 별교일승으로 교판하고 있다. 동교는 일승과 삼승이 융회(融會)해서 같다는 의미이다. 일승이 삼승에 동(同)하고 삼승이 일승에 동한다는 말이다. 일승이 삼승에 동한다는 말은 일불승을 분별하여 셋으로 한다고 하는, 일승에서 삼승이 흘러나옴을 의미하는 향하(向下)적 방면의 동교이다. 일승이 능동(能同), 삼승이 소동(所同)인 것이다. 삼승이 일승에 동한다는 것은 회삼귀일의 향상(向上)적 방면인 동교이다.
별교는 삼승이 별이(別異)하다는 의미로서, 삼승 차별의 교의를 초월하여 독자의 지위를 가지는 절대의 일승으로 설명된다. 행하고 보이는 것이 다 일승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일승이 삼승을 초월해 있다는 것은 삼승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삼승을 다 포섭해서 하나의 교의를 형성하고 있는 곳에 일승의 절대적 의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일승이 삼승을 완전히 포섭하고 있으므로 삼승은 일승에 녹아 형체와 그림자도 볼 수 없다. 따라서 일승과 삼승은 하나가 아니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승이 삼승과의 대립을 초월하면서도 삼승을 포함하는 방면을 별교일승이라 하여, 법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승과 삼승을 융합해서 온전히 하나[全一]로서의 불교로 파악하려 하였다. 그러면서도 동별이교판에서는 분명히 깊고 얕음을 인정해서 동교일승은 삼승을 회통한 일승이라서 아직도 삼승에 상대하는 입장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해 별교일승은 삼승에 대립한 일승이 아니라 삼승을 포함하는 절대의 견지에 입각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천태교의를 차삼(遮三)의 동교라 하고, 화엄을 직현(直顯)의 별교라 하여 화엄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2)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
법장은 다시 일승이 삼승보다 수승한 이유를 오교십종판에서 밝히고 있다. 오교판은 법(法)을 오교에 분류한 것이고, 십종판은 이(理)를 십종으로 분류한 것이다.
먼저 오교는 소승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敎)·종교(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이다.
①소승교 -《아함경(阿含經)》·《비바사론(毘婆沙論)》·《구사론(俱舍論)》등의 설로서 인공(人空)을 설할 뿐이고 법공(法空)을 시현하지 못하므로 대승에서 이를 소승이라 낮추어 부른 것이다.
②대승시교 - 대승의 첫문에 해당한다고 하여 초교라고도 한다. 이에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가 있다. 상시교는 아뢰야연기의 유식설, 공시교는 중관설에 해당한다.
③종교 - 대승종극의 의미로서 숙교(熟敎)라고도 하며 여래장연기설에 해당한다.
④돈교 - 언설과 계위를 세우지 않는 돈오돈증(頓成頓證)하는 의미이다. 연설이 문득 끊어지고 근본자성이 나타나며 해와 행이 몰록 이루어져 일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부처님과 같은 것이다. 일념도 내지 않으므로 불(佛)이고 계위도 세우지 않으므로 돈(頓)이다. 그래서 직현인 불이법문의 유마경설이 이에 해당한다. 지엄은 화엄을 돈교에도 일분 포섭시켰으나 법장은 완전히 다음의 원교에만 해당시켰다. 후에는 선종도 이 돈교에 포섭시켰다.
⑤원교 - 교리행과(敎理行果)가 모두 원융무애하고 자재무진(自在無盡)인 교설이다. 삼승을 융섭하기 위하여 동교를 내세웠으나, 원교의 주된 바는 별교이다. 《화엄경》이 이에 해당한다.
다음 십종판은 오교에서 담고 있는 이치에 의해 10종으로 분류한 것이다.
①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 - 인·법 모두 유(有)라 설하는 종으로서 독자부 등의 설이다. 이를 불법 내 외도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아(我)도 있다고 생각하므로 외도라고 지칭한 것이다.
②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 - 아(我)는 무(無)이나 법(法)은 삼세에 실유(實有)한다고 설하는 것으로서 설일체유부가 이에 속한다.
③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 - 과거와 미래의 법은 법체가 없고 현재의 제법만이 유(有)라는 종으로서 대중부가 이에 속한다.
④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 - 현재법 중에도 가와 실이 있다고 설하는 설가부 같은 것이다.
⑤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 - 속제는 허망하고 진제는 진실이라고 설하는 것인데 설출세부 같은 것이다.
⑥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 - 일체 법은 다만 이름 뿐이요 실유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인데 일설부 같은 것이다. 이상은 소승교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류의 기준은 무엇보다도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얼마나 이해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이해한 정도에 따라 소승의 이치를 분류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제법개공을 온전히 다 이해하면 대승으로 들어가게 된다.
⑦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 - 일체 법은 다 진공이라고 설하는 것인데, 대승시교 중의 공시교에 해당하는 《반야경》·《중론》·《십이문론》 등이 이것이다.
⑧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 일체 법은 오직 진여로부터 연기하며, 진여는 공하지 않고 만덕을 구족한다는 뜻으로 종교에 해당한다.
⑨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 소연상(所然相)과 능연상(能然相)이 함께 끊어진 무념무상의 절언(絶言) 경계로서 돈교에 해당한다.
⑩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 - 낱낱 사법(事法)은 다 일체의 공덕을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주반구족(主伴具足)하고 무진자재함을 현현하는 별교일승의 법문이다.
법장은 법계연기를 밝히기 위해 유식, 중관, 여래장사상를 차용하였다. 화엄교판에서는 대승시교에 유식과 중관을, 종교에 여래장사상을 배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엄이 돈교와 원교에 화엄을 나누어 포섭시키고 있는 것과 달리, 법장은 오로지 별교일승과 원교에만 화엄을 배속시킴으로써 화엄종을 최고의 자리로 굳히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나타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