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겸허

차화로 2005. 11. 25. 01:58

한빛산악회(한빛Alpine Club)의 회훈은 주지 하는 바 대로 다음과 같다


꾸밈없는 겸허에의 동경

아름다운 미지에의 추구

끝이 없는 투지, 한계에의 도전


참으로 산악인으로서 지니고 수련해야 할 정수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첫 구절 ‘꾸밈없는 겸허에의 동경’은 음미 할수록 여운이 있다.

아무 가식없는 있는 그대로 겸허함을 지니고 산에 임하며 일상생할을 영위하고자 노력하는 데 무슨 사족이 필요하랴.

그러나 산은 숲과 바위와 오솔길 등 여러 요소로 이루어져있듯 집의 풍치가 전체모습에서도 나오거니와, 기와와 서까래 대들보 구조 배치 등 나누어 보아도 또 다른 풍치가 있는 것이니 이 항목을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꾸밈없는

꾸밈이 없다는 것은 있는(自) 그대로(然) 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물론 이 자연이란 말은 노자라는 사상가가 최초로 썼던 말이다.

노자는 자연을 명사로 말한 적이 없다. 명사가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실체적 개념이 아니며, 단지 어떠한 사태를 기술하는 문장 형태를 갖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狀詞인 것이다. 자연은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쓰인 적이 없고, 自와 然이 독립된 의미단위이며 그것이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문장인 것이다. 自는 무엇인가? 스스로 自이다. 然은 무엇인가? 그러한 연이다.

모든 존재, 즉 만물의 존재방식을 기술하는 상태어이다.  어떤 존재이든지를 불문하고 그 존재의 존재방식이 ‘스스로 그러하면’ 곧 그것은 자연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어떤 특징을 갖은 것일까?  사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은 인간의 언어적 조작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말이 끝나는 데서 시작하는 말인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분명 어떤 특징이 있다.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

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항상 도는 스스로 그러할 때, 빔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빔을 채워버리는 방향, 그 빔을 근원적으로 파괴시키는 방향으로의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함이 없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빔을 유지하는 함이요, 그 빔을 유지하는 함이야말로 바로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자연이다. 이것은 곧 모든 존재를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 둘 때는 반드시 스스로 그러하게 허를 유지한다고 하는 자연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유위적 행동만이 빔을 유지시키지 않으며 스스로 그러함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존재의 자연이다. 여기서 우리는 虛 와 무위와 자연이 하나로  관통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도의 쓰임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상태어와 달리 명사어인 自然 은 ‘天地’로 표현되어 있다고도 했다.

아무튼 산을 사랑하는 산악인으로서 自然은 몸과 마음의 수련 도량인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도올선생님의 노자강의 내용입니다


겸허

장여헌 선생이 말하기를 ‘虛’는 온갖것을 채우는 창고가 되는 것이요 ‘靜’은 온갖것을 변화시키는 터전이요, ‘貞’은 온갖 일의 줄기가 되는 것이요, 겸손(謙)은 온갖 이로움의 자루요 ‘儉’은 온갖 행복의 근원이다. 원천선생 조목은 말하기를 몸을 잘 보존하는데는 겸손함만 한 것이 없다. 周易의 육십사괘에도 오직 겸손하면 흉한일이 없다고 하였다.

張旅軒先生曰虛爲萬實之府

靜爲萬化之基 貞爲萬事之軆

謙爲萬益之柄 儉爲萬福之源

趙月川先生穆曰

保身莫如謙 易六十四卦惟謙無凶

윗글은 언젠가 보았던 문장이다.
이 글을읽고 차화로는 다음과 같은 詩를 지었었다.


詩人拂拭心鏡兮

精煉其性自成高邁之光而謙之

畵家交感自然兮

忘我漸熟躋入眞境而謙之

學者窮理達本兮

修德行道拯濟人世而謙之

人人常持守中抱一平常心兮

格物體道日日妙用合乎順理而謙之


시인은 마음의 거울을 털고 닦음이여!

自性을 정련하매 고매한 풍모이루니 겸손하여라

화가는 자연과 교감함이여!

자기를 잊어 점차 익어가매 진경에 들어가니 겸손하여라

학자는 理을 궁리하여 진리본체에 통달함이여!

덕을닦고 행도하여 인세를 증제하니 겸손하여라

사람마다 일상 중용으로 포일하는 평상심이여!

物을 格하며 도를 체험하매 나날

묘용이 순리에 합당하니 겸손하여라


1990년 모든 이들이 겸허로이 일상에서 나날이 나아가기를 기원하는 염원으로 적어보았다.


동경

어찌 모든 마음가짐이 항상 뜻되로 되랴.

비운마음도 겸허하려는 마음도 어느 순간 아집과 我相으로 가리고

我相에의해 구분하는 분별로 인하여 탐욕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음으로 뒤덮히는 것이다.

동경하고 살펴보고 끊임없이 실체를 반조해야 하는 것이니 중용에도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하는 것을 일컬어 性이라고 하고 이性을 따르는 것을 일컬어 道라고 한다. 이 道를 닦는 것을 일컬어 가르침이라고 한다’했는데

따르고, 닦는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 바로 이

동경인 것이다.


덜고덜어(損之又損) 자연속에서 계곡의 생명수가 몸으로 흐르고 흙과 바위가 살과 뼈가 되리니, 능선을 지나는 바람은 호흡이며 저 다람쥐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되고 나풀거리는 나비의 날개에 한적한 꿈 담아 천년만년 지나는 이 순간 천겁의세월은 예 아니고 만세를 흘러흘러 오늘 그 자리, 이번엔 어느 산을 올라 고요히 나뭇가지끝에 지나는 바람 만지며 푸른하늘을 같이 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