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이야기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의 서거

차화로 2005. 4. 4. 10:31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난 26년간 이끌어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84)가 현지시간으로 2일 오후 9시 37분(한국시간 3일 오전 4시37분) 서거했다고 바티칸이 발표했다.

호아킨 나바로-발스 교황청 대변인은 “교황께서 2일 저녁 9시37분 처소에서 서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바티칸 시티에서 교황의 서거를 알리는 조종이 울리기 시작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많은 철야 순례객과 방문객, 신자들에게 즉각 전달됐다.

교황은 요로 감염에 따른 패혈성 쇼크로 심장과 신장 기능이 약화되면서 급격히 병세가 악화됐으며 이날 아침에는 고열이 시작돼 점차 의식을 잃었다.

지난 1978년 10월 58세의 나이로 교황에 즉위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유럽에서의 공산정권 몰락과 전세계 11억 가톨릭 신자의 지도자로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를 엄수하는데 보인 탁월한 역할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주요어록*

▲"저는 조금 전에 제가 자란 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는 어머니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 조국은 우리 땅과 같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폴란드는 나의 특별한 어머니입니다. 폴란드의 운명은, 특히 최근 수세기 동안 쉽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는 많은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고통을 받고 계시는 어머니입니다. 이것이 바로 폴란드가 특별히 사랑받을 권리가 있는 이유입니다."(1979년 6월 교황으로 선출된 뒤 처음 조국 폴란드를 방문해 도착 연설을 하면서)

▲"저는 저를 저격한 우리의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읍니다. 저는 세상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제 고통을 바칩니다."(1981년 5월 17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저격한 터키 청년 아흐자를 용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Art : 노스트라다무스의 저 유명한 4행시집에 요한 바오로 2세를 가리켜 '태양의 辛苦'라 표현했는데,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

▲"아흐자 씨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게 한 행동을 모두 용서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품안에서 한 형제이니까요."(1983년 12월 28일 자신을 저격한 아흐자가 복역 중인 로마 교외의 레비비아 교도소를 찾아)

▲"우리는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가 서로 신학적인 대화의 막을 올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교의 통일로 가는 중요한 첫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제3의 천년 왕국'이 다가왔습니다."(1979년 11월 28일 터키 소피아대성전에서. 이날 그리스정교회 디미트리오스 총대주교는 가톨릭이 동-서 교회로 갈리진 뒤 처음 로마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해)

▲"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돈을 치르고 무기를 사게 만드는 세계의 열강들,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파괴를 일삼는 그들이 이제 인류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1980년 5월 초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 방문 중에)

▲"조금만 눈을 돌려 보시오. 여러분도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까. 그 풍요로움이 마음의 가시가 되지 않습니까. 오랜 궁핍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을 그처럼 외면할 수가 있습니까. 이제 조직적인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드십시오. 이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 개혁입니다."(1980년 7월 2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산중턱의 빈민가를 방문했을 때 부유층과 특권층을 향해)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1984년 5월 3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앙 대화와 한국 성인 103위 시성식을 집전하기 위해 방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한국땅에 입을 맞추면서)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하는 말씀을 우리는 공자님의 논어 첫머리에서 듣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 `벗이 있어 먼 데로 찾아가면 그야말로 큰 기쁨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친애하는 벗들이 베풀어 주신 따뜻한 환영에 본인은 감격하고 있습니다."(1984년, 유창한 한국어로 방한 인사를 하며)

 

*교황청과 교황*

 

교황청 : 요약

교황의 이름으로 가톨릭교회를 통치하는 행정기구의 총칭. 성청(聖廳)이라고도 한다. 교황청은 본래 교황 직속의 사제(司祭)와 로마 인접지역의 주교(主敎)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교회의 발전과 함께 확대·분산되어 11세기부터 로마교황청(Curia Romana)이라 불리게 되었다.


 내용

교황의 이름으로 가톨릭교회를 통치하는 행정기구의 총칭. 성청(聖廳)이라고도 한다. 교황청은 본래 교황 직속의 사제(司祭)와 로마 인접지역의 주교(主敎)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교회의 발전과 함께 확대·분산되어 11세기부터 로마교황청(Curia Romana)이라 불리게 되었다. 바오로 6세에 의한 개혁(1967) 직전까지는 12개의 성부(聖部)와 3개의 법원(大審院·抗訴院·內赦院), 5개의 사무처(敎皇宮務院·敎皇授惠廳·敎皇廳財務院·國務院·文書院)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부는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1542년 설치되어 가장 오래된 성부 <검사성부(檢邪聖部)>의 전신(前身)은 13세기의 이단심문소(異端審問所)이다. 성부의 수는 1842년에 최고로 28개소에 달했다. 법원은 12∼15세기에, 각 사무처는 4∼16세기에 걸쳐 성립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은 교황궁무원으로, 명칭은 11세기 것이지만 그 전신은 도서·문서관장을 겸임한 4세기의 상서장(尙書長)이다. 로마중심주의에 대한 세계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교회사목중심주의(敎會司牧中心主義), 그리고 현대화·합리화를 목표로 한 1960∼70년대의 개혁의 결과, 교황청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교황청조직의 말단관서 중 하나에 불과했던 국무원이 교황궁무원과 교황수혜청을 흡수하여 강력한 기관이 되었다. 국무원장관은 교회의 내무를 다루는 장관임과 동시에 교황청의 외교를 담당하는(과거의 교회특별문제성부를 계승했다) 교회외무평의원장관(敎會外務評議院長官)을 겸임함으로써 외무장관 겸 국무총리가 되었다. 신앙교리 및 주교 양성부의 구성원이기도 한 국무원장관은 필요에 따라 각 성부의 장관을 소집하여 성부간의 조정(調整)을 꾀하고, 또한 전세계 약 100개의 주교협의회와 약 2400개 주교구(主敎區)와의 연락을 취하며, 한편으로는 100명의 교황대사(敎皇大使;nuntius), 14명의 교황사절(敎皇使節;delegatus), 그리고 국제연합·유네스코·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국제원자력기구 등 각종 국제기구·국제회의에 대표와 옵서버를 파견, 교황청 외교의 중추역할을 수행한다. 추기경과 주교로 구성되는 성부는 <의례(儀禮)> <교회특별문제>, <산피에트로대성당>의 해체와 예부(禮部)의 분할 및 일부 합병에 의해 12개에서 다음의 9개로 감소되었다. ① 과거의 <이단검사(異端檢邪)성부>에 대신하는 <신앙교리성부> ② 주교구의 통폐합·설치 등을 담당하는 <주교성부> ③ <동방교회성부> ④ <예부성부>의 일부인 <전례(典禮)>와 <성사(聖事)>를 합병한 <성사경신성부(聖事敬神聖部)> ⑤ <성직자성부> ⑥ <수도자 및 재속수도회성부(在俗修道會聖部)> ⑦ 과거의 <포교성부(布敎聖部)>를 대신하는 <인류복음화성부> ⑧ <예부성부>의 일부에서 독립한 <시성시복성부(諡聖諡福聖部)> ⑨ <가톨릭교육성부>가 그것이다. 법원조직은 종래 그대로이며, 사무처는 교황청 재무원·교황청 재산관리원 외에 교황청 문서원·교황 궁무원·교황청 궁중사무국·통계국의 6개 부서로 되어 있다. 이와 연관된 조직으로는 도서관, 세계 최고의 문서관, 인쇄·출판국, 복지원조국, 산피에트로대성당 관리국 등이다. 새로 설치된 것은 <그리스도 일치 사무국> <비(非)그리스도교도 사무국> <무종교자 사무국>의 3개 사무국과 일반 신도의 행정참여를 위한 <평신도위원회>와 <정의평화위원회>이다. 성서, 국제신학, 신(新)불가타성서개정, 교회법·동방교회법 개정, 바티칸공의회(公議會)결정 해석, 전례(典禮), 교회고고학, 러시아·라틴아메리카 홍보, 이주·관광사목(司牧), 가정·여성 등 성부 관계 또는 독자적인 신구(新舊) 20여 개의 전문위원회가 있으며, 교황 학사원(學士院)과 그 외에 성서·고고학·역사·동방학 등의 연구소도 있다. 교황청의 관보(官報)에 해당하는 것은 《사도좌공보(使徒座公報)》이고 각종 통계는 《교황청연감(敎皇廳年鑑)》에 실린다.

 

교황 : 요약
가톨릭교회의 최고지도자. 로마교황이라고도 한다. 로마주교(主敎)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전(全)가톨릭교회의 최고 사제(司祭), 서유럽 총대주교(總大主敎), 이탈리아의 수석(首席) 대주교, 로마교구 대주교이자 바티칸의 원수(元首)이다.


 내용

가톨릭교회의 최고지도자. 로마교황이라고도 한다. 로마주교(主敎)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전(全)가톨릭교회의 최고 사제(司祭), 서유럽 총대주교(總大主敎), 이탈리아의 수석(首席) 대주교, 로마교구 대주교이자 바티칸의 원수(元首)이다. 교황을 부르는 친밀한 호칭인 파파(Papa)는 본래 그리스어인 파파스(papas;아버지라는 뜻)에서 유래하였고, 동방세계에서는 수도원장·주교·총주교를 호칭하는 말이었다. 로마에서는 로마주교 리베리오(재위 352∼366)의 묘비명에 처음으로 새겨졌고, 동방교회가 교황 레오 1세(재위 440∼461) 앞으로 보낸 편지에 종종 쓰였다. 서방교회에서는 5세기 중엽 이래 로마의 주교만이 <파파> <신앙상의 아버지> 또는 <교황>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이 호칭은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에 의하여 보편화되었다. 한편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는 자신을 가리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교황직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중세에 있어서 로마주교는 <대사제> <그리스도의 대리자> <최고 사제>라 불렸는데, 이 명칭들은 전교회의 최고 책임과 사명의 직무를 짊어진 로마주교의 자기의식과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에 대한 전세계 가톨릭신자들의 애경심(愛敬心), 성계(聖界)와 속계(俗界)의 대립 속에 형성된 교황직의 영적(靈的) 권능의 선언을 나타내는 것이다.


 1 교황직의 발전
4세기초 콘스탄티누스대제(大帝) 이래 로마제국의 정치적 중심이 로마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감에 따라, 게르만민족의 이동시대에 로마의 사제는 교황으로서 로마·이탈리아인들의 영적(靈的) 중심이 되었다. 이 목자적(牧者的)인 모습은 다마소 l세(재위 366∼384)·인노첸시오 1세(재위 401∼417)·첼레스티노스 1세(재위 422∼432)·레오 1세에게서 볼 수 있다. 중세에 교황직의 발전은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서 그 기초가 닦여졌는데, 그는 로마·이탈리아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한편 앵글로색슨족의 교화(敎化)에 노력하였다. 중세 초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은 가톨릭 신앙의 이름으로 교황의 영적 권능하에 모였으며, 슬라브민족도 부분적으로 로마교회에 편입되었다. 로마교황권과 프랑크 국왕권(國王權)의 협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2세(재위 715∼731)와 자카리아(재위 741∼752)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그 연대동맹(連帶同盟)은 스테파노 2세(재위 752∼757) 때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카롤링거왕조의 피핀은 교황에게 교황령(敎皇領)을 기진(寄進)하였고, 그의 아들 카롤루스대제는 800년 레오 3세로부더 서유럽의 황제로 대관을 받아 로마교회화(敎會化)를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카롤링거왕조의 말기에는 니콜라오 1세(재위 858∼867)에 의해서 교황직의 위신이 특히 높아졌다.


 2 교황직의 성쇠
교회개혁의 막이 오르고 1l세기 전반(前半) 독일인 교황이 즉위하여 교황직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뒤에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는 <교회의 자유>, 즉 <일체의 세속권력으로부터의 교황직과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에 따라 로마교황과 독일황제의 대립이 격화되어 갔다. 교황권과 황제권의 싸움을 거치면서 교황직은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1216)에 이르러서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8세(재위 1294∼1303)가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에게 패배함으로써 프랑스인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권 아래에서 교황직의 영적 지위를 잃었으며,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옮겨져, 이후 약 70년 동안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는 <아비뇽유수(幽囚)>가 발생하였다. 그 후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옮겨졌으나, 아비뇽에서도 교황이 계속 선출되어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대립하는 이른바 <교회의 대분열(Schisma)>이 시작되어 교황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 속에서 공의회(公議會;종교회의)가 교황보다 우월하다는 <공의회 우위설>이 대두하였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서 니콜라오 5세(재위 1447∼1455) 이래 르네상스의 인문주의(人文主義)와 교황직과의 결합이 시작되었다. 여러 르네상스교황들은 예술과 문화의 보호·창조에 심취했으나, 절박한 교회개혁문제의 해결에는 기여하지 않았다. 르네상스의 영화(榮華)에 심취해 있던 레오 10세(재위 1513∼1521)의 재위 중, 서유럽 그리스도교세계는 종교개혁에 의한 신앙의 분열상황에 처했으며, 교황지위도 떨어졌다.


 3 근대의 여러 교황
고뇌와 희망이 공존하는 가운데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는 새로운 시대를 직시하여 트리엔트공의회를 소집하였다. 비오 5세(재위 1566∼1572)·그레고리오 3세(재위 1572∼1585)·식스토 5세(재위 1585∼1590)는 가톨릭교회의 쇄신에 헌신하였으며, 바오로 5세(재위 1605∼1621)·그레고리오 15세(재위 1621∼1623)는 이를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베스트팔렌조약 체결로부터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시대에, 서유럽에서는 세속화가 진전되어 교황직의 지위는 여러 가톨릭국가에서도 쇠퇴하였다. 클레멘스 13세(재위 1758∼1769)와 클레멘스 14세(재위 1769∼1774)의 시대, 나아가서는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제 1·2 차세계대전이 일어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황직은 고난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나폴레옹 1세가 가한 수난들을 견디어낸 비오 7세(재위 1800∼1823)의 운명은 교황직에 숭고한 영적 위신을 더해 주었다. 19세기 낭만주의에 뒷받침되어 가톨릭의 부흥이 활발해지고 교황직의 지위도 향상되었으나, 교회 내의 정신·사상적 여러 조류(潮流)가 대립을 일으켰다. 국가주의나 자유주의 조류는 반(反)교황주의를 강화했으며, 가톨릭 지식인들도 교황직에 등을 돌렸다. 1864년 발표되었던 비오 9세(재위 1846∼1878)의 《유설표(謬說表;Syllabus)》는 근대문화에 대한 세계관적 도전이었다. 레오 13세(재위 1878∼1903)는 가톨릭교회와 근대세계와의 친밀한 관계를 터놓았으며, 비오 10세(재위 1903∼1914)는 교회 내의 신앙 재생(再生)에 진력하였으나, 베네딕토 15세(재위 1914∼1922)와 비오 11세(재위 l922∼1939)는 전쟁과 혁명에 따른 세계적 불안에 직면하였으며, 또 비오 12세(재위 1939∼1958)는 제 2 차세계대전이라는 전인류적 수난을 떠맡아야 했다. <교회는 각 민족의 실정에 맞게 개혁되어야 한다>고 한 요한 23세(재위 1958∼1963)의 목자 정신은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요한 바오로 1세(1978)와 현재의 요한 바오로 2세(1978∼)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씨스티나 성당*

 

요약
바티칸시국(市國) 로마교황청 안에 있는 성당. 교황선거회의가 거행되는 장소이다. 처음에는 교황전용의 성당으로서 1278년 니콜라오 3세의 제안으로 세워졌으나, 식스토 4세의 명에 따라 조반니 데 돌치가 1473∼81년에 전면적으로 개축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혼란을 반영하여 성당과 성채(城砦)의 기능을 겸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내용

바티칸시국(市國) 로마교황청 안에 있는 성당. 교황선거회의가 거행되는 장소이다. 처음에는 교황전용의 성당으로서 1278년 니콜라오 3세의 제안으로 세워졌으나, 식스토 4세의 명에 따라 조반니 데 돌치가 1473∼81년에 전면적으로 개축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혼란을 반영하여 성당과 성채(城砦)의 기능을 겸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성당 안의 대리석 제단부분 칸막이와 성가대석은 미노 다 피에졸레의 작품이고 벽화는 C. 로셀리·S. 보티첼리·D. 기를란다요·페루지노 등이 1481∼83년에 제작하였다. 제단을 향해 왼쪽에는 《모세의 생애》,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6면씩 그려져 있다. 벽화 위 높은 창의 좌우에는 각각 감실(龕室) 안에 서 있는 모두 24명의 교황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 제작은 기를란다요·보티첼리·프라 디아만테가 맡았다. B.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장화는 율리오 2세의 명으로 1508년에 착수하여 12년에 완성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천장을 나누고 중앙부를 세로로 연속하는 9개의 직사각형 틀 속에 창세기이야기를 그렸다. 다음으로 이것을 둘러싸듯이 12명의 유명한 예언자와 여자 예언자의 좌상을 배치하였고, 이것이 창세기이야기와 서로 맞닿는 곳에 20체(體)의 청년나상을 그렸다. 또한 성당 제단 뒤의 《최후의 심판》도 바오로 3세의 명으로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작품이며 이는 A. 단테의 《신곡(神曲)》에서 구상을 얻어 종교관을 대담하게 조형화한 작품이다.

 
"내부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구약성서》 〈창세기〉장면과 예언자 및 무녀들, 제단 뒤 동쪽벽의 《최후의 심판》은 B.미켈란젤로 작품, 좌우벽면은 S.보티첼리·D.기를란다요·페루지노에 의해 그려졌으며, 오른쪽의 북측벽 중앙부 6구화는 세례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생애》, 왼쪽남측벽 중앙부 6구화에는 《모세의 생애》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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