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5] 주몽, 적과의 동침
- 고구려와 부여, 카인과 아벨 -
김운회(동양대 교수)
1. 해모수와 금와왕
고구려의 신화를 보면 부여와 주몽과의 갈등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 왕자들은 주몽을 계속해서 죽이려 하고 주몽은 이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을 신화의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주몽의 집단은 분명 부여와는 동일 계열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드라마 ‘주몽’은 이 점을 매우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즉 한족들이 요동 방면으로 공격해오자 수많은 쥬신(범한국인 : 요동 몽골 만주 지역의
유목민)의 공동체가 파괴되었고 그 유민들이 요동과 만주 즉 부여 방면으로 이동해옴으로써 부여로서는 매우 성가신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척박한
만주 땅의 생산력은 한계가 있는데 많은 인구가 유입됨으로써 동족들 간의 갈등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자 한족(漢族 또는 漢人)들은 오히려 이 갈등을 부추겨서 한족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한족 태수의 일이라는 것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범한국인(쥬신)을 분열시켜 한족의 안전한 통치을 가능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분할 통치(Divide &
Rule)가 주 업무라고 할 수 있다. 한족들은 그것만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드라마 ‘주몽’은 이 점을 확실히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고구려나 부여의 신화를 보면, 단순히 왕실의 갈등처럼만 보이지만 드라마에서는 한족의 침략 → 유민의 발생 → 유민 수용 과정에서 대립과 분열 발생 → 한족(漢族)의 개입 → 분열의 가속 →
한족(漢族)의 지배력 강화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점에서 드라마 ‘주몽’은 상당한 성공을 거둔 듯하다.
드라마에서 해모수와 금와왕은 절친한 친구로 나온다. 그러나 해모수가 꿈꾸는 것은 범쥬신(범코리안 : 범한국인)들의 힘을 규합하여 조선(쥬신의
나라)을 다시 건설하려는 것이고 금와의 생각도 다르진 않지만 부여의 지배층의 생각은 해모수와는 다르다. 굳이 무리해서 한족과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여의 안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드라마 ‘주몽’을 떠나서 좀더 사실적인 문제에 접근해보도록 하자. 필자의 생각으로는 주몽과 부여의 갈등
즉 고구려와 부여의 갈등은 이후 남부여의 성왕(백제 성왕) 대에 이르러 신라 - 남부여․열도부여(일본)의 갈등으로 바뀌고 이후 고려․조선 -
일본, 한국 - 일본의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고 본다(상세한 해설은 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2권 18장 참고). 다시 말해서 주몽과
부여의 갈등은 이후 지금까지 쥬신 내부의 갈등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갈등의 최초 원인으로써 고구려와 부여의 갈등을 살펴보는
것은 범한국인의 역사를 아는데 매우 중요하다.
2. 주몽, 적과의 동침
사서에 나타난 기록으로 보면, 주몽은 부여에 의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위서(魏書)』에는 “부여 사람들은 주몽이 사람이 낳은
존재가 아니므로 그가 역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고 그를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
그래도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하자 주몽의 어머니는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하므로 너는 지혜와 재주가 있으니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업을 도모하도록 해라’라고 했다(『魏書』「高句麗傳」).”라는 대목이 나온다. 만약 주몽을 신흥세력(또는 유이민 집단)으로 본다면 이 세력은
부여로 부터 상당한 핍박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고대사의 여명기에 쥬신족이 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정사들과 그 동안 연구를 종합해보면 알타이에서부터 이동한 유목민(범한국인
: 쥬신족)들의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1 , 159쪽).

[그림 ①]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
(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그림①]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맥족(범쥬신, 범한국인)은 알타이 지역에 거주하던 흉노의 일파로 알타이에서부터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①]은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이 경로 뿐만 아니라 알타이-바이칼에서 몽골 내륙을 거쳐 바로 남하했을
수도 있다. 오치르 몽골역사 연구소장은 “한국인의 뿌리는 몽골”이라고 단언하는데 그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서 싱안링[흥안령(興安嶺)]산맥을 돌아 이동해 보면 그 끝 닿는 곳이 바로 한반도이며 다른 길은 없다고
한다(신현덕 “현장에서 본 역사와 문화” - 몽골기행 『세계일보』1996. 2.1).그래서 한국인들의 핏속에는
용기와 야성으로 잘 알려진 몽골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고려하여 다시 민족 이동 경로를 그리면 [그림②]와 같이 될
것이다([특집 4] 참고).

[그림②] 범한국인의 아무르강(흑룡강) 합류
몽골 내륙으로 직접 내려온 부분에 대한 중국 사서의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경우는 중국인들과 접촉하지를 않기 때문에 중국 사서의 기록에
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BC 3세기 경에 요동 만주 에서 이들은 합류하는데 이것은 한(漢)나라의 압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니만큼 실제는 훨씬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인구와 강력한 왕권을 가진
한족(漢族)의 압박이 쥬신(범한국인)의 합류를 촉진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합류의 과정은 훨씬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타이 - 싱안링 - 북만주는 하나의 교통로인데다 허베이 북부는
험준한 산악과 황토고원 및 사막(고비-오르도스) 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황하지역을 통과해 간 쥬신들과 싱안링을 거쳐 바로 내려간 쥬신들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탁록(현재 베이징 지역)이나 산둥반도(山東半島) 지역에 머무르던 쥬신들은 한족의 압박이 있을
경우 지속적으로 요하(遼河) 방면으로 이동해갔을 것이다.
『사기(史記)』(흉노전)나 『산해경(山海經)』에 연(燕)나라가 맥국을 쳐서 내몰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시기는 BC 3세기 경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무르강(흑룡강) 중류 송화강 지역에 고리족이 등장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가들이
인정하고 있다.
북방사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는 예맥에서의 맥족의 원래 이름은 ‘코리’라고 한다. 즉 『위략(魏略)』이나[『위략』에는 고리(槀離 :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까오리])]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맥족의 원래 명칭은 모두 코리(Khori)를 음역한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구리,
구려, 고려, 고구려, 코리아(Korea) 등의 말들이 나온 것이다.
이 고리국(코리국 : 동호
지역[만주 서부 : 현재의 요하~요서]으로 추정 - 리지린 선생의 견해)이야말로
고조선(베이징 - 요하 지역)과 더불어 한민족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볼 수 있다(약간의 논리적 비약은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같은
예맥족[또는 숙신족]인 고조선과 고리가 발생의 선후는 알 수 없지만 남북으로 흩어져 남북국을 형성한 것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
이 부분은 이지린․강인숙 『고구려 역사』(평양 1976) → 이지린․강인숙 『고구려 역사』(서울 : 논장출판사, 1988 영인본) 38~54쪽
참고 : 상세한 해설은 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1권 5장). 왜냐하면 고조선은 멸망후 그
유민들이 만주와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고리국에서는 부여가 나왔고 고구려에 의해 다시 부흥했으며 백제와 일본이 또 부여를 기반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참고로 요하(遼河) 지역은 고리국과 고조선의 문화 영역이 중첩되는 곳으로 추정 된다. 이 지역이 바로
홍산문화권(紅山文化圈)이다([특집 4] 참고).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도(玄ꟙ)에서 천리가 떨어져 있다. 남으로는 고구려와 접해있고 동으로는 읍루(挹婁),
서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여있다. 북으로는 약수(弱水)가 있고 지방은 2천리가 되며 호수(戶數)는 8만이다(『三國志』「魏書」 東夷傳).”라고
하는데 부여의 터전은 대체로 현재의 눙안(農安)에서 하얼삔(哈爾濱)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림 ③] 부여의 위치
그런데 이 지역으로 사람들이 밀려오게 되면 당장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식량문제이다. 이 지역은 당시의 기술로는 곡물생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식량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고구려는 좋은 밭이 없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부족하며 “성질이 사납고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三國志』「魏書」
東夷傳).”고 하고 『남사』에도 “고구려 사람들은 흉폭하고 성질이 급하고 노략질을 좋아하며(人性凶急喜寇) 그 풍속은 음란하여(其俗好淫)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兄死妻嫂)”고 하고 있다(『南史』「列傳 東夷 高句麗」).
고구려의 경우를 보면 만성적인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약탈과 침략 전쟁이 불가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북만주에 위치하지만 넓은 평원
지역인 부여보다도 남만주 요동에 가까운 고구려는 산악지대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식량문제는 더욱 심각한
사안이어서 자주 굶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간단히 말해서 농업과 목축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부여와는 달리 대부분 산악지대였던 고구려는 일찍부터 전쟁을 통한 식량의 확보라는 국가정책 방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성격은 한편으로는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권국가(覇權國家)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겠지만 바로 인근하고 있던 부여로 봐서는 고구려로 인하여 국가위기가 상존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부여는 친한정책(親漢政策)의 카드를 집어든 것이고 고구려는 독자 노선을 걸었는데 이것은 결국 고리족(코리족 또는 쥬신족 : 범한국인)의
분열과 적대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송화강 유역의
부여가 고구려에 의해 사실상 멸망하여 속국화되자 부여는 다시 한반도로 내려가 반도부여(백제)를 건설하여 처절히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점점
강성해지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반도 부여 세력들은 다시 일본열도로 이주해갔으며 이것이 열도부여(일본)의 성립을 가져왔다.
부여 중흥의 대표적인 성군 성왕(백제의 성왕)의 죽음과 고구려 멸망 이후 반도부여(백제)의 멸망의 책임을 물어 부여세력(열도 부여)은 다시
신라와 적대적인 관계에 들어서게된다(상세한 내용은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 18장. ‘왜 한국인들의 이름 -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 을 참고할 것).
3. 고구려와 부여, 카인과 아벨
고구려와 부여의 싸움은 천년 이상 계속되어오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뿌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반도부여(백제) 왕들의 전사(戰死) 기록이다.
고려나 조선시대를 보면 국왕(國王)이 전사한 경우는 거의 없지만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에는 국왕이 전쟁의 와중에서 죽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반도부여(백제)의 책계왕(責稽王 : 재위 286~298)은 고구려가 대방군을 공격했을 때 군사를 보내 대방을 도운 까닭에
피살당하고, 분서왕(汾西王
: 재위
298~304)도 낙랑태수의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三國史記』「百濟本紀」). 이에 맞서 반도부여(백제)의 복수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반도부여(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이자 후일 장수왕은 도성을 함락하여 개로왕(蓋鹵王 : 재위
455~475)을 살해하는 등 끝없는 복수전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부여가 고구려에 밀리는 형국이다. 부여는 고구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대를 이어 끝없이 이어지는 적대감 속에서 고구려는 부여적인 특성을 버리고 다시 코리국(고리국 또는 까오리)으로
회귀하게된다. 이것이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지만 부여와 등을 돌리고 스스로 고리(고구려)라고 한 이유이다. 즉 고리국(槀離國 : Kohri)에서
부여가 나온 것이고 그 부여에서 다시 고구려가 나오는데 A(고리) → A'(부여) → A"(고구려 = 고리국 = A) 라는 형태가 된다.
그러나 부여나 고구려는 많이 다르게 들려도 실제로는 별로 다른 말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천손족(天孫族)들이다. 범한국인(쥬신)은 ‘하늘’이나 ‘태양’을 표현해야 하는데 자신의 문자가
없으므로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漢字)를 빌려 ① ‘高(고 : 뜻을 빌림 - 높다)’ ‘桓(환 : 소리를 빌림 - 환하다)’ ‘白(뜻을 빌림
- 빛나다)’ ‘不[소리를 빌림 - 의미는 불(火)]’ 등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무리를 나타내는 말은 ② ‘여(與)’ 또는 ‘여(黎)’이므로
이것들을 조합(① + ②)함으로써 뜻은 대동소이하지만 다양한 나라의 이름들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① 하늘 또는 태양의 의미와 ② 무리를 붙인
말들을 만들어 보면 ‘高黎(고려)’, ‘不與(불여)’, ‘不黎(불여)’ 등이 쉽게 도출된다. 그런데 그 뜻은 모두 하늘의 자손 또는 그 무리라는
의미를 가진다(박시인선생, 양주동 선생 등의 견해).
한족(漢族)들은 단지 쥬신들이 부르는 소리를 가지고 기록을 하기 때문에 ‘고여(高黎)’, ‘고려(高麗)’,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리(高離)’ 라든가 부여(夫餘), ‘불이(不而)’나 불여(不黎) 등의 말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을 한자로 보면 모두 다른 나라가 되지만
쥬신(한국인)의 언어로 본다면 대동소이하다.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말들의 한자(漢字) 말이 가지는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민족의 나라(천손족의 나라)’라는 말이 된다.
한국의 보수 사학자들은 한문에만 집착하다보니 고구려, 구려, 고려 등도 다른 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물론 고구려라는 말의 기원을 구리[銅 : 땅속의 태양을 상징 - 태양 또는 하늘을 상징] 또는
고을(나라 - 골, 『몽골비사』에서는 홀리[忽里(코리)]), 까마귀[烏]의 울음소리[嗚] 등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 부분 상세한 해설은 『대쥬신을 찾아서』제1권 참고).
다시 부여로 돌아가자.
부여는 물론 고리국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 곳에서 뛰쳐나와 새나라를 건설했을 것이고 고구려도 부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부여에서 나와
새나라를 건설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고구려(고려라고도 함)라고 한 것은 자기들이
고리국(槀離國)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부여를 제압하는 더 큰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모두가
다 고리국의 일파가 아닌가? 이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관계를 형성하면서 끝없이 투쟁했으며 그 결과 부여는 송화강(북부여 : 원부여)
→ 장백산(동부여) → 요동부여(위구태, 울구태의 부여) → 반도부여(백제) → 열도부여(일본) 등으로 확장 또는 이동해 간 것이다([특집
2], [특집 3] 참고).

[그림④] 부여의 영역과 이동
결국 부여는 고구려와의 대립과정에서 한족(漢族)과의 통교를 통하여 보다 발전된 문화를 습득하는 한족화(漢族化) 정책을 시행한 반면, 고구려는
고리국의 전통을 중시하여 반한족적(反漢族的) 정책을 시행했다. 그래서 이 두 나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길로 가고 있었다. 이제 그
끝없는 동족 상잔의 비극(悲劇)도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18. 왜 한국인들의 이름 -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19. 몽골, 또 다른
한국
관련 사이트 : www. ebiz114.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