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옥포대첩의 역사적 의의

차화로 2005. 7. 18. 15:56
우선 먼저 백과사전 자료 입니다.

한산도 대첩
임진왜란 때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일본해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본문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비보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함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다는 보고에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 40여 척과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전함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함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니 왜군은 득의양양하여 끝까지 쫓아왔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려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적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쏘아 적함을 격파, 분소(焚燒)한 것만도 66척,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져죽고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초식(草食)하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제1절 한산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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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왜군의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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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육전에서는 연일 승전보가 이어지고 있는 반면 해전에서는 연전 연패하여 전선 및 병사의 손실이 막대할 뿐 아니라 남해 연안부터 서해 연안까지 점진적으로 왜성을 쌓아 서해로 우회하여 한강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내륙지방은 조령, 추풍령 등 험준한 산악이 많아 군수품 보급로가 되지 못한다.
이미 보급선(補給船)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고 때가 마침 보리고개라 군량의 현지 조달도 여의치 못하여 보급에 적신호가 발생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더구나 조선의 청야작전(淸野作戰)은 철저하여 어려움을 더하였다.
그러던 차에 구주의 나고야 본진에 있는 풍신수길은 해군의 연속되는 패전소식에 크게 노하고 서해 돌파없이는 침략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판단아래 수륙양면의 새로운 공격부대를 재편성하여 건곤일척의 총공격을 개시하게 되었다.
풍신수길은 조선에 파견되어 있는 수군 장수들을 총망라하여 대단위 함대를 편성하였는데 선봉장에는 협판안치(脇坂安治)를, 중군에는 구귀가융(九鬼嘉隆)을, 그리고 가등가명(加藤嘉明)을 참모로 삼아 서해 돌파 작전에 나서게 했다.
이들 3인은 그동안 육전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협판안치는 중무소보 (中務少輔)의 관직을 가진 일본 병고현(兵庫縣)의 3만석 대명(大名)으로 개전이래 최대 규모인 5만 조선군의 최대저항이 있었던 용인전투에서 난마쾌도(亂麻快刀)로 단 30분만에 조선대군을 패주케하여 실질적으로 조선 지상군의 예봉을 완전히 꺾은 명장이요, 구귀가융은 해군장관격인 장수로 대외수(大외守)의 관직에 있던 삼중현(三重縣) 3만5천석의 대명으로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아 조선 침략을 위하여 각 영주들에게 병선 건조를 할당 독려했던 수군장이요,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형 거북선과 철갑선 건조에 힘썼다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왜의 수군에 있어서 협판안치와 등당고호(藤堂高虎)가 전투를 잘하는 맹장이라면 구기가융은 전략가형의 장수였다.
그리고 부사령관이자 참모인 가등가명은 어릴 적부터 풍신수길이 양육하여 전쟁터마다 데리고 다닌 가신으로서 좌마조(左馬助)의 관직에 있 던 애원현(愛援縣) 6만석의 대명이었다. 이 수군 편성만 보아도 왜국은 서해 돌파작전에 얼마나 애를 쓰고 있 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그와 동시 육군은 백전의 용장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과 입화통호 (立花通虎) 그리고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으로 하여금 3만의 정병(精兵)으로 전라방면의 공격을 명령하였다. 육군의 가등청정, 흑전장정 등은 서울 이북지역에서 각각 할당된 영지 건설에 착수하였기 때문에 이번 동원에는 빠지게 되었다. 평양성의 소서행장과 종의지는 그들의 수군이 서 ·남해를 둘러 북상하여 대동강을 통하여 평양성에 도착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히 육지에서는 전주성, 금산성, 이치, 웅치에서 전투가 개시되고 바다에서는 저 유명한 한산해전을 시발로 안골포해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해전이 숨가쁘게 전개되었다.
일본 나고야 본영에서는 이 협공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수륙군이 평양에서 만나 대열을 재정비, 수륙병진하여 명나라 진격에 나설 수 있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 조선(전라감영)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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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임금과 조정 중신들마저 피란가고 전 국토가 왜병에게 유린 당하여 오직 전라감영만이 살아남아 가까스로 전쟁수행능력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인솔한 4만 관군과 충청순찰사 윤국형(尹國馨) 그리고 경상순찰사 김수(金수)의 병사 1만, 총 5만의 근왕군이 편성되어 6월 7일 용인에 있는 북두산 전투에서 회심의 일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단단히 믿었던 근왕군마저 협판안치에게 역공을 당해 개전 불과 반시간 만에 전군이 참패, 궤멸되어 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으며 나라의 운명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걸려 있게 되었다.
그 북새통에 광주목사 권율(權慄)은 스스로 전주성 방어차 북상을 서둘렸고 고경명(高敬命)이 이끄는 조선 의병군이 처음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오직 해전에서만은 조선수군의 선전으로 겨우 전라도 땅을 지키며 척의 서해 우회를 봉쇄하고는 있었으나 경상우도의 정보로는 요즘 10에서 30여척에 이르는 왜의 선단이 자주 출몰하고 있어 또다시 수륙 양면에 왜적의 이상동태가 감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급한대로 전라함대로 하여금 이에 대응토록 하는 초비상 전국에 돌입하고 있었다.

. 이순신의 제 3차 출동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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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출동에서 돌아와 부상병 치료, 선박과 무기 수리 등의 일로 한참 바쁜 와중에 육지쪽의 왜적이 전라도 공략을 서두르고 이에 왜의 수군도 호응하여 서진(西進)하는 기미가 있다는 정보가 계속 입수되어 이순신은 다시 출동의 뜻을 굳혔다.
7월 4일 약속대로 이억기 함대가 여수 본영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지난번에는 양 함대가 당포 해상에서 조우하여 철저한 합동훈련을 할 겨를이 없이 곧 바로 당항포 해전에 뛰어 들었으나 이번 3차 출동에는 전라우수영 함대가 미리 왔으므로 7월 5일 좌우 함대의 합동기동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밤 늦게까지 정보도 분석하고 다가올 해전의 공동작전을 세웠다.
다음날 7월 6일 함대가 발진하여 경상우수영 함대와 노량에서 합류, 창선도에 정박하여 밤을 새웠다.

4. 당포 김천손의 황금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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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동풍이 세차게 불어 힘든 항해 끝에 또 다시 전진기지인 당포에 도착하여 식수와 연료를 준비하고 있을 때, 당포의 목동 김 천손(金千孫)이 우리 배를 보고 급히 달려와서 전하기를 “오늘(7월 7일) 2시경 왜선 대.중.소선 합하여 약 70여척이 영등포와 거제를 거쳐서 지금 견내량에 닿아 있다”고 하였다.
김천손은 이곳 목관(牧官:군마를 돌보는 직) 밑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김천손이 전하는 정보 내용은 해전이 끝난 뒤에 밝혀졌지만 적 함대의 척수, 이동경로 및 이동시간 등이 아주 정확하여 조선함대가 앞서 해전의 대세(大勢)를 장악하는데 결정적 정보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견내량에 왜선이 오후 2시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당일 20km의 거리를 약 4시간만에 주파했으니 얼마나 힘들여 달려왔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함대는 이 정보를 기초로 제장들과 밤샘 작전회의를 통하여 필승의 결의를 다쳤으며, 다음날 7월 8일 아침 일찍이 적이 정박하고 있는 견내량 해역으로 달려갔다.

5. 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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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대가 견내량 바깥 바다에서 적진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에 왜의 척후선 2척이 우리 함대의 동태를 살피고서 자기들 본진으로 쏜살같이 되돌아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왜의 수군은 이미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을 조선수군의 예상항로에 배치해 두고 정탐 중이었으며, 우리 척후선이 추격하자 그들의 선단으로 재빨리 되돌아 갔다.
가까이 추격하여 확인해보니 왜의 수군의 함대는 우리 함대보다 규모가 큰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의 대선단이었다.
이들은 나고야에 있는 풍신수길의 명을 받아 지난 6월 14일에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서 각기 전비를 갖추어 웅천에 일단 집결하였다가 제일 먼저 출발한 협판안치가 이끄는 제1제대 소속 함대 73척이었다.
나머지 제2제대와 제3제대 소속 함대는 견내량에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서해돌파작전에 동원된 왜의 전선수는 총 115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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