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초대 천황은 진무 천황입니다.
우리나라 백제의 한 사람이 우연히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사람의 선진지식으로 일본이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천황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시조가 비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키히토 현 일본천황도
자신이 백제왕실의 후손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작년 12월 23일, 지금의 아키히토(明仁) 일본왕이 기자회견을 갖고,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하는 천황가의 내력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자 TV(일본 NHK방송)로 그 말을 직접 듣고 있던 일본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일본왕 몸속에 흐르는 한국 피
일본 역사에 있어서 역대 일본왕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지금까지 누구나 마음속으로만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키히토 왕의 공개발언에 그들이 놀랐다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설마하니 지금의 아키히토 일본왕의 입에서 그런 사실을 그대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내놓고 말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일왕의 고백에 놀란 것은 비단 일본사람들뿐만은 아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TV 뉴스와 각 신문보도를 통해 역시 크게 놀라고 말았다.
또한 지난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세상을 몹시 시끄럽게 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 아니고 한국에 진출해서 철로건설이며 온갖 산업을 발전시켜 주는 등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제는 “한국의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만들어 전쟁터로 끌고 간 일이 전혀 없다”는 등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다 역사를 엉뚱하게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왜곡의 소용돌이가 차츰 조용해지고 있던 무렵, 뜻밖에도 아키히토 일왕이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말한 것이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 ‘일본서기’(역사책·720년 편찬) 등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며 초대받아 온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문화며 기술이 전해져 왔습니다. 나 자신의 경우는 간무(桓武)천황의 친어머니(생모)가 백제 무령왕(501∼523 재위)의 자손이라는 것이 `속일본기'(797년 천황가 편찬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듯이 한국과의 핏줄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이 당시에 일본으로 백제의 오경박사(五經博士)들이 대대로 초대되어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왕자인 성왕(523∼554 재위)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같이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은 그의 핏줄이 백제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의 불교를 비롯해서 모든 학문이며 문화가 한국으로부터 건너와 비로소 일본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까지도 숨김없이 밝힌 것이었다.
그러한 아키히토 일왕의 진솔한 고백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그는 현재 자신이 일본국왕이며 천황가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매우 가치가 큰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 집안의 핏줄이 한국이라는 것을 그가 증언한 것은 일본의 천황가 역사를 숨김없이 밝힌 최초의 `양심선언’이라 보고싶다.
아키히토 일왕이 말하는 간무천황의 생모인 백제여인은 누구인가. 이름은 화신립(和新笠·뒷날의 고야신립(高野新笠)황후·생년미상∼789)이며 무령왕의 직계 후손 화을계(和乙繼·8C)의 딸이다. 그 당시 화을계는 백제왕족으로서 천황가 조정의 조신(朝臣)이었다. 그 때문에 화신립 낭자는 그 무렵 천황가의 시라카베 왕자(뒷날의 제49대 고닌 천황, 770∼781재위)와 결혼해서 왕자비가 되었던 것이다. 시라카베 왕자와 화신립 왕자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야마베 왕자(뒷날 제50대 간무천황)이다.
간무 천황의 아버지인 고닌 천황(시라카베 왕자)도 백제왕족이었다. 고닌 천황이 백제인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고대 문헌 ‘대초자’(1157년)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간무 천황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백제왕족인 것이다.
서로가 똑같은 韓·日 신화
고대 일본땅에는 미개한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 학자들은 일본 선주민은 아득한 옛날에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의 주민들이 표류해서 일본열도로 오게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또한 일부는 북쪽 지방의 아이누족 등이 추운 곳에서 따뜻한 일본열도로 남하하여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이들 선주민들은 대개 키 작은 왜소한 미개인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 사람처럼 그들보다 키가 큰 지금의 일본사람들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들의 대부분은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즉 신라인·백제인·고구려인 등이다. 가령 서울의 지하철속에서 `일본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또한 일본 도쿄의 전철을 타고 있다면 일본인은 `한국인'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간에 잠자코 아무말 없이 있다면 누구도 국적을 구분해내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본래 똑같은 민족이다.
이 사실은 여러 저명한 일본 학자들이 지금까지 연구해 왔다. 또한 일본의 옛날 문서에도 `한·일동족'의 기사는 여러 가지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관계는 앞으로 자세하게 밝히기로 하고 이제 재미있는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일본서기'에 실려있는 신화를 읽어보면, 우리나라 역사책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신화와 똑같은 것들이 여러 가지가 나온다.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왕 등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역사문헌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일본의 여러 권위있는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테면 오노 스즈무(大野 晉·1919∼)교수는 일본의 건국신화는 한국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옮겨온 것이라고 입증했다. 즉 하늘신(天神)의 자손이 지상의 산봉우리로 내려와서 백성을 다스리는 일본 역사책 `고사기'며 `일본서기’의 기사는 벼농사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온 한반도의 정복자들이 만든 신화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고증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손강림의 신화가 조선의 건국신화와 전혀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라는 것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천손강림의 신화에서 보면, 거기 등장하는 인물의 대부분이 벼농사에 관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조선반도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고, 그 곳에서 금속기(쇠붙이도구)를 사용하며 생활하고 있던 종족이 일본땅으로 천손강림의 신화와 금속기(대장간에서 쇠로 만든 칼이며 농기구 등)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해준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그와 같은 정치적·경제적인 변혁을 규슈(九州) 땅으로부터 긴키(近畿)지역의 서부 일본지역에 퍼뜨린 것만이 아니다.
언어(말)에 있어서도 고구려의 언어, 백제의 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살피게 해준다 〉(`일본어의 세계’·1980)
이제 이론보다는 실제로 흥미있는 일본신화 한 가지만 접해보자.
日 대국주신은 신라神
일본 역사책 ‘고사기’(712년 편찬)에는 대국주신과 그의 아들 탄생신화가 다음처럼 실려있다.
〈어여쁘고 단정한 처녀 `이쿠타마요리 히메’는 사귀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모습은 늠름하고 위엄이 넘쳤다. 그는 느닷없이 밤에만 아가씨를 찾아왔다. 둘이는 서로 사랑하여 함께 지내는 동안 오래지 않아서 그 미녀는 아기를 가졌다. 그러자 딸의 배가 부른 것을 본 부모가 이상하게 여기며 사정을 묻게 되었다.
“너는 혼자서 아기를 가졌구나. 남자도 사귀지 않고 어떻게 아기까지 가졌느냐?”
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잘 생긴 젊은 사람을 만났는데 아직 그 사람 이름은 몰라요. 매일 밤 찾아와서 함께 지내다가 아기를 가졌어요”.
이 말을 들은 부모는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딸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며 말했다.
“붉은 흙을 네 방 마루바닥에다 뿌리고 기다란 삼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그녀는 부모가 가르쳐준 대로 했다.
이튿날 아침에 살펴보니 삼실은 문고리 구멍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청년은 뱀이었던 것이다. 그 실을 뒤쫓아 가보았더니 삼실은 미와산에 이르러서 신의 사당으로 들어갔다. 신은 뱀이 되어 문고리 구멍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후 이쿠타마요리 히메는 신의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오타타네코 ’이고, 아버지인 신은 `대국주신(大國主神)’이었다.
일본역사책에서 대국주신은 신라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책 `삼국유사’에 나오는 견훤의 탄생 설화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그의 딸은 얼굴이 단정하고 어여뻤다.” 딸이 어느날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늘 자주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찾아와서 함께 지냅니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하기를 “너는 기다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람의 옷에 꽂아 두어라”. 그렇게한 뒤 그 이튿날 실을 따라서 북쪽 담밑에 나가보았더니 바늘이 큰 뱀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어서 한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15살이 되자 스스로를 가리켜 ‘견훤’이라 일컫고 완산군에 도읍을 정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본전에 기록된 견훤은 신라땅 상주(尙州) 은현 사람이다.
여하간 이와같은 견훤의 탄생설화가 일본에 건너가서 신의 아들 오타타네코의 신화로 바뀌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백제의 한 사람이 우연히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사람의 선진지식으로 일본이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천황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시조가 비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키히토 현 일본천황도
자신이 백제왕실의 후손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작년 12월 23일, 지금의 아키히토(明仁) 일본왕이 기자회견을 갖고,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하는 천황가의 내력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자 TV(일본 NHK방송)로 그 말을 직접 듣고 있던 일본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일본왕 몸속에 흐르는 한국 피
일본 역사에 있어서 역대 일본왕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지금까지 누구나 마음속으로만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키히토 왕의 공개발언에 그들이 놀랐다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설마하니 지금의 아키히토 일본왕의 입에서 그런 사실을 그대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내놓고 말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일왕의 고백에 놀란 것은 비단 일본사람들뿐만은 아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TV 뉴스와 각 신문보도를 통해 역시 크게 놀라고 말았다.
또한 지난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세상을 몹시 시끄럽게 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 아니고 한국에 진출해서 철로건설이며 온갖 산업을 발전시켜 주는 등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제는 “한국의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만들어 전쟁터로 끌고 간 일이 전혀 없다”는 등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다 역사를 엉뚱하게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왜곡의 소용돌이가 차츰 조용해지고 있던 무렵, 뜻밖에도 아키히토 일왕이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말한 것이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 ‘일본서기’(역사책·720년 편찬) 등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며 초대받아 온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문화며 기술이 전해져 왔습니다. 나 자신의 경우는 간무(桓武)천황의 친어머니(생모)가 백제 무령왕(501∼523 재위)의 자손이라는 것이 `속일본기'(797년 천황가 편찬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듯이 한국과의 핏줄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이 당시에 일본으로 백제의 오경박사(五經博士)들이 대대로 초대되어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왕자인 성왕(523∼554 재위)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같이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은 그의 핏줄이 백제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의 불교를 비롯해서 모든 학문이며 문화가 한국으로부터 건너와 비로소 일본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까지도 숨김없이 밝힌 것이었다.
그러한 아키히토 일왕의 진솔한 고백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그는 현재 자신이 일본국왕이며 천황가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매우 가치가 큰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 집안의 핏줄이 한국이라는 것을 그가 증언한 것은 일본의 천황가 역사를 숨김없이 밝힌 최초의 `양심선언’이라 보고싶다.
아키히토 일왕이 말하는 간무천황의 생모인 백제여인은 누구인가. 이름은 화신립(和新笠·뒷날의 고야신립(高野新笠)황후·생년미상∼789)이며 무령왕의 직계 후손 화을계(和乙繼·8C)의 딸이다. 그 당시 화을계는 백제왕족으로서 천황가 조정의 조신(朝臣)이었다. 그 때문에 화신립 낭자는 그 무렵 천황가의 시라카베 왕자(뒷날의 제49대 고닌 천황, 770∼781재위)와 결혼해서 왕자비가 되었던 것이다. 시라카베 왕자와 화신립 왕자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야마베 왕자(뒷날 제50대 간무천황)이다.
간무 천황의 아버지인 고닌 천황(시라카베 왕자)도 백제왕족이었다. 고닌 천황이 백제인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고대 문헌 ‘대초자’(1157년)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간무 천황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백제왕족인 것이다.
서로가 똑같은 韓·日 신화
고대 일본땅에는 미개한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 학자들은 일본 선주민은 아득한 옛날에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의 주민들이 표류해서 일본열도로 오게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또한 일부는 북쪽 지방의 아이누족 등이 추운 곳에서 따뜻한 일본열도로 남하하여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이들 선주민들은 대개 키 작은 왜소한 미개인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 사람처럼 그들보다 키가 큰 지금의 일본사람들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들의 대부분은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즉 신라인·백제인·고구려인 등이다. 가령 서울의 지하철속에서 `일본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또한 일본 도쿄의 전철을 타고 있다면 일본인은 `한국인'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간에 잠자코 아무말 없이 있다면 누구도 국적을 구분해내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본래 똑같은 민족이다.
이 사실은 여러 저명한 일본 학자들이 지금까지 연구해 왔다. 또한 일본의 옛날 문서에도 `한·일동족'의 기사는 여러 가지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관계는 앞으로 자세하게 밝히기로 하고 이제 재미있는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일본서기'에 실려있는 신화를 읽어보면, 우리나라 역사책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신화와 똑같은 것들이 여러 가지가 나온다.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왕 등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역사문헌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일본의 여러 권위있는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테면 오노 스즈무(大野 晉·1919∼)교수는 일본의 건국신화는 한국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옮겨온 것이라고 입증했다. 즉 하늘신(天神)의 자손이 지상의 산봉우리로 내려와서 백성을 다스리는 일본 역사책 `고사기'며 `일본서기’의 기사는 벼농사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온 한반도의 정복자들이 만든 신화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고증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손강림의 신화가 조선의 건국신화와 전혀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라는 것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천손강림의 신화에서 보면, 거기 등장하는 인물의 대부분이 벼농사에 관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조선반도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고, 그 곳에서 금속기(쇠붙이도구)를 사용하며 생활하고 있던 종족이 일본땅으로 천손강림의 신화와 금속기(대장간에서 쇠로 만든 칼이며 농기구 등)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해준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그와 같은 정치적·경제적인 변혁을 규슈(九州) 땅으로부터 긴키(近畿)지역의 서부 일본지역에 퍼뜨린 것만이 아니다.
언어(말)에 있어서도 고구려의 언어, 백제의 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살피게 해준다 〉(`일본어의 세계’·1980)
이제 이론보다는 실제로 흥미있는 일본신화 한 가지만 접해보자.
日 대국주신은 신라神
일본 역사책 ‘고사기’(712년 편찬)에는 대국주신과 그의 아들 탄생신화가 다음처럼 실려있다.
〈어여쁘고 단정한 처녀 `이쿠타마요리 히메’는 사귀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모습은 늠름하고 위엄이 넘쳤다. 그는 느닷없이 밤에만 아가씨를 찾아왔다. 둘이는 서로 사랑하여 함께 지내는 동안 오래지 않아서 그 미녀는 아기를 가졌다. 그러자 딸의 배가 부른 것을 본 부모가 이상하게 여기며 사정을 묻게 되었다.
“너는 혼자서 아기를 가졌구나. 남자도 사귀지 않고 어떻게 아기까지 가졌느냐?”
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잘 생긴 젊은 사람을 만났는데 아직 그 사람 이름은 몰라요. 매일 밤 찾아와서 함께 지내다가 아기를 가졌어요”.
이 말을 들은 부모는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딸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며 말했다.
“붉은 흙을 네 방 마루바닥에다 뿌리고 기다란 삼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그녀는 부모가 가르쳐준 대로 했다.
이튿날 아침에 살펴보니 삼실은 문고리 구멍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청년은 뱀이었던 것이다. 그 실을 뒤쫓아 가보았더니 삼실은 미와산에 이르러서 신의 사당으로 들어갔다. 신은 뱀이 되어 문고리 구멍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후 이쿠타마요리 히메는 신의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오타타네코 ’이고, 아버지인 신은 `대국주신(大國主神)’이었다.
일본역사책에서 대국주신은 신라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책 `삼국유사’에 나오는 견훤의 탄생 설화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그의 딸은 얼굴이 단정하고 어여뻤다.” 딸이 어느날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늘 자주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찾아와서 함께 지냅니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하기를 “너는 기다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람의 옷에 꽂아 두어라”. 그렇게한 뒤 그 이튿날 실을 따라서 북쪽 담밑에 나가보았더니 바늘이 큰 뱀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어서 한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15살이 되자 스스로를 가리켜 ‘견훤’이라 일컫고 완산군에 도읍을 정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본전에 기록된 견훤은 신라땅 상주(尙州) 은현 사람이다.
여하간 이와같은 견훤의 탄생설화가 일본에 건너가서 신의 아들 오타타네코의 신화로 바뀌었던 것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고대 도시의 현재이름 (0) | 2005.07.18 |
---|---|
고구려의 역사 (0) | 2005.07.18 |
이순신 장군의 전적 (0) | 2005.07.18 |
옥포대첩의 역사적 의의 (0) | 2005.07.18 |
[스크랩] 고려장은 없었다 (0) | 2005.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