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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화민국 -보이차 (11)

차화로 2005. 2. 15. 19:08

 

 

 

 

 

 

 

 

 

 

 

 

 


※ 중화민국


운남성 정부와 민간기업 공동으로 운영 생산하는 "관변민영"회사를 차려 1930넌경까지 운영하였으며, 스리랑카, 인도 등과 차의 국제 시장에서 경쟁을 하게 되었다. 푸어차는 서역, 미얀마, 태국 등 남양일대로 판로를 개척하였다.2차 대전으로 "육계재단"에 의해 독가 농단되어 오다가 후에 다른 재단과 합병 인기공사(人企公司)가 운영되었으나 경영무력으로 쇠락하였다.

 


<중차공사 설립(봄화균선생 회억담)>


1936년 여름 상해 상품전시회 중국차엽 특전에서 근래 100년이래 세계 차 생산국의 생산량은 급성장한 반면 중국차 생산량은 급강하하여 위기감을 느끼고 1937년 봄 중앙경제부 주제하에 매성(每省)에서 20만원의 출자금과 중앙 경제부 및 큰 개인 차창에서 200만원의 출자로 중국차엽총공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범화균 선생의 주도하에 기계, 생산, 차종 등을 설계하고 낙후된 수공생산 방법(方法)에서 대규모생산의 기계화 방식으로 홍차를 주 생산품으로 정했다.1938년 중차공사와 운남성정부합작 설립 운남 중차공사를 곤명시에 세우고 대표(代表)에 류운태선생, 정학춘 경리, 순녕, 불해, 의량 3곳에 실험차장을 설립하였다.

1)건창(建廠) 전 현지조사


불해지구는 변방지역으로 소수민족인 타이족이 거주하는 특수지리 환경, 생활습속을 가진 곳으로 일반에게 생소하여 사전 답사 조사를 하였다.1939년 봄. 장석성 선생과 곤명시를 기점으로 하여 미얀마에 이르는 국도를 따라 불해지방에 도착하기는 반년이 지났다. 원래 불해지방은(현재 맹해) 천연 야생차구로 대엽차종의 원산지이다.

차잎 생산량이 충분하고 품질이 좋고 홍차를 만드는데 인도산의 품질을 능가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한편으로 이 지방은 매년 악성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생활이 낙후하고 환경, 상업조건, 화폐의 통화가 쉽지 않고 기후는 건기와 습기의 두 계절로 나뉘어 악조건이 따랐다.

2)인원 및 물자조달


1939년 겨울 곤명 류 사장 사택에 모여 그사이 조사한 것을 취합, 최종결정을 불해에 실험적 차창을 만들기로 하였다. 차창 창업 준비금으로 5만원을 받아 착수하고,

출자금은 50만원으로 불해차장을 창업키로하고, 양우호 불해현장(佛海縣長)의 협조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1940년 봄, 정식 창업하고 중경을 왕복하며 중차총공사로부터 차 제차공(茶 製茶工) 25명, 강서정제차공원(江西精製茶工員)20명, 기술훈련생 20명, 의량차창의 대나무 포장공5명을 차출하였고,

차창 정기술자 90여명도 아산, 원강, 흑강, 푸어, 사모, 차리 등지를 경유 월여만에 현지에 도착하였다. 한편, 의료진, 전공, 철공 등과 자재 의약품 타이족이 좋아하는 장신구, 수건, 천, 보온병, 아동완구 등 일용 잡화는 태국 화교 의미후(蟻美厚)선생의 도움으로 방콕에서 미얀마를 거쳐 현지에 운송되었다.

3)자력갱생(自力更生)창설


차창부지는 맹해(불해)시 중심부근 황무지를 개간 창설키로 하였다. 당시 이곳은 땅의 소유주도 없었고, 산림목재 또한 주인없는 것으로 벌목하여, 목재로 사용하여 창건에 유용하였다.

4)창건2년


①긴차는 서장 민족에게는 하루도 없어서는 안될 생활 필수품이었다. 긴차는 제조과정도 복잡하지 않아 매년 겨울철에 찻잎을 수매하여 쪄서 눌러 긴차를 만들어 포대에 넣어 40여일 경과하면 자연 발효하여 차가 완성된다. 이후에 포대를 벗기고 포장하여 서장, 인도 등지에 판매한다.


②2차 대전 이전 인도,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 있어 화물운송통관이 한 개의 나라와 같이 취급되어 면세통관, 판매운반이 용이하였다.

후에 인도, 미얀마 분쟁 후에 통관과 운송이 쉽지 않았고 세금이 무겁게 부과되어 어려움이 닥쳤다.1949년 중국이 공산정부로 바뀌고 사업의 위기를 느끼자 많은 개인차창들은 서로 지원, 운남차엽공사의 지도 아래 집단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개인차창들은 경영을 크게 축소하고 차엽을 일괄구매, 계획 분배하고, 국가 계획아래 일괄처리 되었다. 그 후 모든 개인차창은 인민공사화하여 국가에서 흡수 관리하였다.


1958년 대약진 운동으로 정부의 확대 푸어차 생산 돌입으로, 각 차구의 모든 사람이 차밭에 나가 채취하여 차밭이 황폐화되고 수확이 반감되었다.
1960년대 초 과거 큰 차나무는 작은 관목 차나무 밭으로 개량하여 전통방법을 탈피하고 신 차원의 개량 찻잎을 개량방법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1973년 하관차창에서 만든 신 차가 서장지역에 판매되어 이를 마신 사람들이 두통과 혈압이 오르내리고 구토현상이 일어났었다. 이는 신 차수로 품질이 저하된 원인이었다.


1979년 개혁 개방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 차밭도 밀식 재배, 인공시비, 기계채취 방향으로 바뀌고 속속 전통 교목노차(喬木老茶) 밭은 사라져 갔다. 생산품도 녹차, 홍차, 푸어차 위주로 되었다.


녹차도 전청과 전녹으로 양분되었다. 전청은 전통적 제조방법인 햇빛에 말린 차이고, 전녹은 불에 말려 만든 것으로 운남녹차라한다.

일광(日光)으로 말리고 증기압으로 성형시켜 오래 진화된 차를 진년푸어라하고, 햇빛에 말려 만든 산차(散茶) 혹은 성단차(成團茶)를 청빙푸어차라 한다.

1973년 이후 개발한 불에 말려 일정정도 급발효시켜 만든 것을 푸어숙차 또는 신수숙차(薪樹熟茶)라 한다.

현재는 급발효한 숙차를 푸어차라 하고, 발효하지 않고 청차를 성단한 차를 청병 또는 청차라 한다.(운남지방)


 

출처 : 중화민국 -보이차 (11)
글쓴이 : 아란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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